통장에 월급이 채 꽂히기도 전, 엄마로써 회사에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타이밍은 생각보다 일찍 왔다. 밤 사이 아이가 열이 났던 것.


사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는 '엄마'라는 타이틀이 회사에 적응하는데 오히려 도움을 주었다. 대화를 매끄럽게 끌어가는 재주가 없는 나에게 아이는 적절한 주제였다. 내 소개를 좀 더 하다보면, 졸업은 작년에 했는데 왜 이제서야 일을 시작하느냐는 질문이 도출된다. 그럼 아이가 하나 있고, 딸이고, 나이는 한살 반이고, 같이 졸업논문을 쓴 후에 일년동안 아이와 시간을 보냈다고까지 물 흐르듯 대답하게 되는 것이다. 동료들 대부분은 티는 안 내지만 꽤 놀라는 눈치였다. 놀랄만도 하지. 이제 일을 시작하는데 애가 있는 케이스가 독일인들에게도 많지 않은데, 외국에서 공부하겠다고 왔다는 사람이 그 공부가 이제 막 끝났는데 애가 있다고 하니. (여기 사람들에 비해 동양인들은 어려 보인다는 것도 한 몫 한 것 같고. 내가 그래 보였다는게 아니라...) 아무튼 내가 엄마라는걸 알게되면 대화가 끊겼을 때 다시 시작하기는 엄마이기 전 내가 겪었던 것 보다는 쉬웠다. 아이 어린이집 얘기, 언어 얘기, 사춘기가 온 너희 애 얘기, 아이와 휴가 보내는 얘기, 날씨와 감기 얘기...


그리고 엄마라고 하면, 나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도 조금 달라지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신입으로 들어 온 느낌이랄까. 이제 막 일을 시작한, 어제까지만 해도 학생인 애가 아니라, 조금이나마 동지애를 공유하는 사람으로 대하는 것 같은. 뭐 어디까지나 느낌이 그랬다는거다, 느낌이.


애가 있는 학생이었던 시절이 지나고, 주부로써 1년을 보내고, 애가 있는 신입사원이 된 나는 회사에서 아주 날아갈 것 같았다. 이건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 육아는 진짜 넘사벽이다. 학업보다, 직장생활보다 비교 할 수 없을만큼 훨배 힘들다. (그리고 이 중에서 나는 아직까지 회사생활이 제일 쉽다.) 일년만에 써보는 프로그램과 전공 관련 머리가 이제 슬슬 적응이 되는가 싶을 무렵, 아이가 열이났다. 날이 급격히 추워지긴 했지만 어제 어린이집도 잘 다녀오고 잠도 잘 잤는데.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책을 읽어주는데 몸이 좀 뜨끈했다. 잠을 좀 덥게 자서 그런가 했는데 이미 열이 39도. 새벽에 깬 아이 뒤치닥거리 하느라 아직 자고있는 남편을 깨워 이 비보를 알렸다.


내가 일을 시작하면서 남편은 50%로 일을 한다. 9시에 출근해 점심시간 없이 1시에 퇴근하는 직장생활이다. 이렇게 하기로 선택하면서 아이가 아프면 남편이 회사에 얘기해 아이를 케어하기로 말을 맞추긴 했었다. 하지만 막상 이 계획이 현실로 닥치니 난감한 모양이다. 이번주 목요일은 독일 공휴일이라, 샌드위치데이인 금요일은 어린이집이 방학하는 날이다. 그래서 남편이 하루 휴가를 쓰기로 했었는데, 그 휴가를 어제(월요일)에 냈다는거다. (아니, 그 날 어린이집 방학이라고 얘기 한 지가 언젠데...) 오늘, 내일 아이 때문에 못간다고 회사에 얘기하면, 화요일부터 쭉 쉬고 다음주 월요일에 출근하게 되는건데, 하필 어제 금요일 휴가를 내 놓고 와서, 계획적으로 아이가 아프게 된 것 같은 뉘앙스라는거다. 그래서 내일 아이 열이 내리면 어린이집에 보내도 되는지 물어보겠단다. (하이고, 어린이집 1도 모르는 소리 하시네.) 어린이집 전화해서 그 말도 꺼내기 전에 내일도 오면 안된다는 소리 듣고 시름에 빠져있는 남편에게 얘기했다. 그럼 하루는 내가 회사에 못 간다고 할게.


나의 성취보다는 가족의 행복이 내 행복이라는 생각으로 처음 회사를 골랐었는데, 지금이 또 한번 가족의 평화를 선택할 순간이야, 라고 생각했다. 사실 반은 기분 맞춰주려고 한 얘기였는데 남편이 그걸 덥썩 물었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남편이 다니는 회사보다 규모가 크고, 그런 부분에서 좀 자유롭긴 하다만, 나 아직 첫 월급도 안 들어왔는데... 


회사에 출근해서 앞 자리 사수(?)에게 얘기했다. 아이가 열이 나서 내일 집에 있고 싶은데 팀장한테 얘기하면 되냐고, 일단 너한테 얘기하는거라고. 막상 말을 꺼내려니 좀 망설여지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더 말하기 어려울 것 같아 질러버렸다. 그랬더니 팀장한테 얘기하면 된다면서 아이가 많이 아프냐고, 자기 아들 놀이방 애들도 다 아프다고, 이 날씨에 안 아플 애들이 없다는 무심한 듯 따뜻한 대답이 돌아왔다. 팀장(이자 임원단)은 너가 아픈걸로 등록을 하게 되면 간단하긴 한데 나중에 너가 아팠을 때 사용하지 못 할 수도 있으니 어떻게 해야하는건지는 알아보라는 대답을 들었다. 쿨하게 당연히 내일 안나와도 된다고 했지만, 자기는 한번도 써 본 적이 없다고 말을 덧붙이며 보인 어색한 웃음이 자꾸 생각났다. 모르는 부분이라 민망해서 그랬던걸까.


우리 층에는 남편처럼 아이 때문에 5-60%로 일하는 엄마가 두 명 있다. 그리고 이번주는 Baden-Württemberg주의 모든 학교가 방학이라 그 둘 모두 휴가.  80%로 일하는 아빠가 있어 물어보았다. 자기 부인은 집에서 일 해서 스케줄 조정이 자유로운 편인데, 미팅이 있어나 하면 자기가 시간을 내야한다고. 애가 아플 때 자기는 이렇게 했었다고 친절하게 얘기 해 줬지만, 자기도 딱 한 번 써봤다고 얘기하며 어색한 표정을 보였다. 잘 모르는 부분이라 민망해서 그랬던걸까.


비서아줌마 한테도 얘기하고나니 내일 일 하러 오지 않는걸 모두에게 확인받은 느낌이었다. 그 중 누구도 결재권을 가진 사람은 없었지만. (소아과에서 진찰을 받을 때 아이가 아파 부모가 아이를 돌봐야하면 소견서를 써준다. 이것만 가지고 가면 원칙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그리고 퇴근하기 전, 사수와 팀장이 같이 하는 프로젝트에 어제부터 내가 같이 하기 시작했던거라 오늘 작업 한 걸 사수와 얘기하는데, 사수가 자꾸 물어본다. 그래서 너 내일 안오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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