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를 낳게되다니. 내가. 그렇게 아이를 싫어하던 20대를 지나, 그 끝에 첫째를 낳고, 지금은 둘째까지 품고있다.

첫째를 낳기 전에, 그러니까 내가 진짜 엄마가 되는건지 채 실감이 나지 않을 때, 호기 반 뿌듯함 반으로 이렇게 얘기했더랬다. 나는 아이에게 살면서 안되는 것도 있다는걸 알려주는 엄마가 될거라고. 세상에 나가서 쓴 맛을 보고 좌절하기 전에, 집에서 좌절의 맷집을 키워주겠노라고. 정말 뭘 모르고 한 철없는 생각이었다.

아이를 만 3년정도 키우고 나서, 이제야 겨우 초보엄마 딱지를 뗄랑 말랑 할 년차가 되고서야, 험난하고, 알 수 없고, 그래서 설레는 ‘육아’라는 세계를 고개 들어 둘러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 같다.

‘아이가 느끼는 좌절감’에 대해서도 태도가 정 반대로 바꼈다. 바깥에서 어차피 받을 좌절감, 집에서는 느끼지 않게 해주자! 로 ㅎㅎ
“오늘 유치원에서 리니한테 놀자고 했는데 리니가 Lass mich!라고 했어.”
유치원에서 친구가 혼자 놀겠다고 했다고 속상해 하는 아이에게 ‘그럴 수도 있지. 너도 친구한테 가끔 혼자 놀고싶다고 얘기하잖아.’가 아닌, ‘같이 놀고싶었는데 친구가 혼자 논다고 해서 슬펐구나.’라고 대답 해 준다.


첫째를 낳기 전의 다짐이 그랬다면, 둘째를 낳기 전의 지금 내가 하는 다짐은 이렇다.

‘둘째는 첫째랑 다르다. 각자의 개성을 찾아 내가 누구인지 자아를 찾는데 도움을 주자.’

누구나 자아를 찾는 시간을 거치지만, 나는-혹은 대다수의 한국 젊은이들은- 그 시기가 청소년기가 아니라 대학에 가고 난 이후였다. 사춘기때는 공부라는 지상과제가 있었기 때문에, 생각이고 뭐고 제대로 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대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야 한참을 ‘내가 누구인지’를 찾으려 고군분투 했다. 아직도 문득 새로운 나를 인지하기도 하고.

나를 찾는게 어려웠던, 혹은 그 시간이 너무 늦게 찾아왔던 이유 중에 하나로, 나는 엄마의 말들도 꼽고싶다. 세 남매를 키워낸 우리 엄마는 밥상에서 자주 하는 말이 있었다.
“이거 시금치 너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잖아.”
....?? 네에? 저기요? 엄마 딸은 30대 중반인 지금도 파는 걸러놓고 국 먹을 정도로 채소 편식쟁인뎁쇼???
내가 저 말을 실시간으로 들었던 때에도, 참 어이없었다. 그 느낌이 아직도 기억이 날 정도니까. 그리고 엄마는 저 레파토리를 끊임없이 써먹었다. 어제가 시금치 였다면, 오늘은 콩나물 무침인 식으로.

채소를 좀 먹이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었겠지만(설마 채소를 좋아했던 둘째와 나를 헷갈렸던건 아니라고 믿고싶다), 나는 잠깐이라도 내가 좋아하는것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가지고 헷갈렸다. 그래서 나는 내가 시금치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그림 그리는걸 못 하는건지 못 한다고 생각하는건지,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지 못 듣는지도 잘 모르겠는, 스무살이 되었다.


둘째의 성별은 꽤 일찍, 임신 12주 차에 알게되었다. 산부인과 선생님에게서 ‘아들’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속으론 내심 딸이길 원했었구나를 진료실에서 깨달았다. 뒷통수를 맞은듯한 띵 한 느낌이었으니까.

진료를 마치고 차분히 있으니, 웃기게도 설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둘째에게 정말 좋은 징조였다. ‘둘째는 첫째랑은 완전 다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으니까. 첫째와 같은 성별이었다면, ‘첫째가 이랬으니 둘째도 이렇겠지’하는 선입견으로 육아 초반을 채웠을 것 같다. 하지만 천만 다행으로 둘째는 다른 행성에서 온 성별이었고, 그래서 초보 엄마의 시행착오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설렜다. 가보지 못한 옆나라 육아를 경험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라고 쓰고 좀 울어본다 😂)


두 아이의 예비 엄마로써, 둘째를 돌볼 때 첫째때 만든 내 색안경을 좀 벗어둘 것을 다짐한다. 사소한 행동부터, 장난감 취향, 음식 취향까지. 나도 아니고, 첫째도 아닌, 둘째만의 개성을 존중 해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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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관계. 요새 딸의 화두다. 아닌가 나의 화두인가.
‘오늘 말로가 나랑 안 놀아줘서 슬펐어.’
‘리니가 나는 자기 친구 아니라고 해서 화났어.’ 등의 말로 오늘 유치원에 대한 평을 한다. 혹은 나에게 그 말이 딸의 기분의 모두인 것 처럼 마음에 돌이 되어 얹힌다.

독일 엄마 커뮤니티에도 어제 같은 재질의 글이 올라왔다. 다섯살 된 여자아이인데, 친구에게 너랑은 이제 안 논다는 말을 듣고와 너무 속상해 한다고. 근데 그 앞에서는 웃으면서 운다고.

독일에서 외국인으로 살면서 생긴 나의 모난 마음들이 딸에게 투사된다. 딸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 된다. 여기가 내가 나고 자란 나라라면, 그래서 나도 좀 밝은 머리색과 피부색을 가진다면, 이런 작은 소외는 좀 쿨하게 넘어갈 수 있을까.

아이들이 그런때가 있다고, 그러다 다음날이면 또 같이 어울려 논다고. 그러다 베프가 바뀌기도 하고 한다고. 선배 엄마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 한다. 한결같이 그렇게 이야기 하고, 리니도 생일파티에 초대받지 못해 속상해한다고 얘기도 듣고, 심지어 말로도 우리 딸이 오늘 자기랑 안 놀아줬다고 하고.

커뮤니티에 댓글로 여러 대안들이 쏟아져 나왔다.
* 의연하게 대처하기 : 부모가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아야 아이도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 엄마도 친구 사귀는건 어렵다고 이야기해주기
* 그 친구들은 우리 딸이랑 못 놀아서 아쉽겠네! 하고 역으로 생각해보기. 이 얘기한 아빠, 자존감 최고!
* 나의 나빠진 기분을 바로 표현하기

그리고 생각지 못했던 다른 문제들도 떠올랐다.
* 친하게 지내는 베프가 없다는게 문제가 될 수도 있구나 : 그 반에 베프를 만들지 못해 반을 바꾸는걸 제안했다는 유치원 선생님 이야기가 있었다.

한국이라면 문제도 안된다. 유치원에서는 모두가 친구고, 생일파티에도 반 친구 모두를 초대하니까. 그런데 여기는 만 네살부터 자기 친한 친구 네다섯에게만 초대장을 보낸다. 나름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나만 생파 초대장을 못 받는다면... 그건 치유가 가능한 마음의 상처일까. 나같으면 카드가 없는 사물함을 본 그 순간부터 복수의 칼을 갈았을 듯.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하는 상황이긴 하지만, 네 살은 너무 빠른거 아니야?

네 살 시절을 한국에서 보낸 엄마는, 독일에서 이 시기를 보내는 딸에게 어떤 응원을 해야 할 지. 여전히 좀 막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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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 금수저 : 부모님이 적극 육아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

나는 육아 흙수저다. 금수저를 너무 갖고싶은 육아 흙수저. 지난 한 주는 독일 학교들의 방학이었다. 그런데 회사에 워킹맘으로 60%만 일을 하는 동료가 도통 퇴근할 생각을 안한다. 이야길 들어보니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네 갔단다. 목요일에 돌아와서 그 전엔 자유롭게 퇴근할 수 있었던거다. 그는 육아 금수저다.

독일은 아이 보육원 적응기간이 길다. 최소 2주에서 길게는 6주. (어떤 커리큘럼은 3일에 끝나기도 한다는데, 보거나 들은적은 없다.) 딸 아이는 적응을 곧잘 하는 편이라 이번 유치원 적응기간을 2주로 기대했었다. 나 4일, 남편 6일 적응기간을 같이 하는걸로 극적타결 했었는데, 중간에 선생님이 아파서 못 가는 날이 있고 하더니 3주가 지났는데도 아직 온전히 끝나지는 않았다.

적응기간동안 독일 부모들은 출근을 어떻게 해결하나 검색 해 봤더니,
1. 자기 휴가를 사용하거나,
2. 부모님 찬스를 쓴단다.

자기 휴가를 사용한다는 이야기는, 곧 여름 휴가 대신 적응기간을 보낸다는 뜻 일거다. 중간에 이사를 가거나 큰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초등학교 가기 전 까지 2-3년은 이 보육시설에 다닐테니, 2-3년을 위한 투자 쯤으로 생각하는 듯.

부모님 찬스를 쓴다는 댓글도 종종 있었는데, 이번에 아이 적응기간을 같이 보낸 아이 여덟의 보호자 중에 조부모는 없었다.

육아 금수저도 나름의 고충이 있겠지. 금수저 가능성이 있던 곳에서 지 발로 걸어나와 흙수저를 자처한 나로서는, 짐작만 가능한 그 고충 대신 이 곳의 장점을 선택한거니까 할 말은 없지만 부러운건 부러운거다.

아픈 목 큼큼거리며 책 안 읽어줘도 되고, 밤에 잠좀 안 깨고 푹 잘 수도 있고, 집안 돌아다니면서 안 치우고 그냥 침대에서 나오지 않을 수도 있을테니. 진짜 아플 때 만이라도, 단 하루 밤 만이라도 육아 금수저 잠깐 물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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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은 딸의 세 번째 생일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유치원에 머핀을 좀 구워 보내면 땡이었는데. 그럼 유치원에서 노래불러주고 작은 선물 주고, 아이도 하루종일 생일자 대접 받으며 좋아하고. 그런데 생일 바로 전 날 유치원에서 전화가 왔다. 담임선생님이 아파서 오늘, 내일 아이를 보낼 수 없다고. (독일에는 이런 일이 종종 있다. 맞벌이 하는 집은 대략난감.)

회사에 사정을 설명하고 일찍 퇴근하기로 남편과 합의를 보고 출근하는데, 그제서야 내일 아이 생일인게 떠올랐다. 친구 하나 못 만나고 보내는 만 세살 생일이라니... 부랴부랴 연락을 해보니 당장 내일 오후에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은 딸 친구 한 명, 내 친구 한 명이다. 손님이 있으니 생파를 할 수 있겠어! (이 자리를 빌어 다시한번 감사드린다. 그대들 덕분에 딸랑방구가 정말 행복해 했어!!)

요리하고 머핀굽고 할 시간은 없다. 다 사서 공수하기로 한다. 남편은 슈퍼에서 달달구리를 사고, 나는 회사 끝나는 길에 케익을 사오기로 합의. 일퇴 후 집에서 딸랑방구를 데리고 데코 풍선을 같이 사러 다녀오는 계획까지. 딸은 오랜만에 버스도 타고, 자기 생일 풍선도 사서 너무너무 좋아했다. 파티를 준비하는 설렘도 덤. 그 날바람이 정말 엄청 불던 날이었는데, 헬륨 들어간 숫자풍선과 발레리나 풍선을 들고, 나중엔 딸래미까지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생파 준비의 하이라이트였다.

생일은 정말 성공적이었다. 각자 하고싶은 것 하는 파티! 남편은 집 사무실방에서 업무를 보고, 아이들은 바닥에 도화지 펴고 그림그리고, 내 친구는 기타치고, 나와 딸램친구 엄마는 쇼파에 있고. 아이들은 원없이 초코렛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2주 후, 딸 생일파티 풍선의 바람이 다 빠져갈때 쯤. 딸 생일에 와 주었던 딸 친구의 생일파티가 있었다. 주말에 집에서 하는 파티였다. 테마는 무당벌레. 벽에는 종이 무당벌레가 날아다니고, 테이블 위엔 3층 케이크 무당벌레가 등장!

그 다음날은 딸아이 예전 어린이집 친구의 생일맞이 키즈카페. 우리 말고 다른 친구 한 명이 더 오기로 했었는데, 감기때문에 못 왔다. 입장료는 각자 내고 점심은 생일자가 쏘는 심플한 생일파티. 둘이 원하는 놀이기구가 달라 엄마들이 좀 바쁘긴 했지만, 환기가 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내 생일도 곧이다. 남편의 수준급 미역국을 또 맛볼 수 있는 기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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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네살의 시작이다. 아침이면 일어나기 싫다고 징징, 옷 안 갈아입겠다고, 양치질은 책 보면서 한다고 징징... 지금처럼 점심 먹기 전에 유치원 하원 해 집에 오는 날이면, 낮잠을 자지 않겠다고 또 한바탕 징징, 저녁잠도 자지 않겠다고 징징... 총체적 난국이다.

그래서 점심을 먹다가 충동적으로 오늘은 낮잠을 자지 말자고 했다. 주말에 엄마아빠와 놀다보면 가끔 낮잠을 패스하곤 했으니, 슬슬 뗄 때도 됐다는 생각에서다. 자기 싫어하는 애를 낮잠 재우려니 나도 힘들고, 한 번 낮잠들면 두 시간은 기본이라 저녁잠 재우는 것도 여간 힘든게 아니다. 낮잠을 자지 않고도 낮에 잘 버텨준다면, 낮에 기운 빼지 않고 저녁에도 금방 잠들거라는 큰 그림이었다.

역시나 낮잠을 안 자고도 낮에 떼를 많이 쓰지 않았다. 대신 컨디션이 안 좋은 엄마만 좀 자고, 아이는 홈오피스 중인 남편이 대신 맡았다. 노는데 ‘좀 졸리네’ 한 마디 했단다. 저녁먹고 샤워하고 책 좀 읽다보니 일곱시 반. 졸려하는게 눈에 보였는데, 그래도 한 권 더 읽어달란다. 마지막 책 내용을 듬성듬성 읽어주고는 침대로 데려왔다. 많이 졸린지 침대에 제대로 눕지도 않고 칭얼댄다. 내복바지 벗고, 기저귀 차고, 쪽쪽이 물고, 거의 바로 딥슬립. 오예!

지난달 까지 가던 키타에는 12시 반 부터 낮잠시간이었다. 이번달부터 가는 킨더가르텐에는 낮잠시간 대신 쉬는시간이 있단다. 만 세 살 이상의 어린이들만 있으니 낮잠은 대부분 뗐지만, 오후에도 풀 파워로 놀기 위해 1시부터 모든 아이들이 30분 동안 어두운 방에서 누워있는단다. 그 동안 잠이들면 일어날 때 까지 따로 깨우지는 않는다고.

낮잠이나 밤잠이나 사실 상관은 없다. 중요한건 아이의 충분한 수면시간. 그리고 충분한 양육자의 쉬는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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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구급차 타고 출산하러 간 이야기 #2  (0) 2019.04.12

우리는 보육시설 운은 정말 좋다. 내가 사는 슈투트가르트는 정말이지 보육시설 자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내 직장에는 출산 후 일주일에 단 몇시간이라도 일을 하고싶어하는 동료가 있다. 출산 6개월 후 일주일에 며칠 출근하는가 싶더니, 다시 휴직에 들어갔다. 그동안은 부모님이 낮동안 아이를 맡아주셨는데, 아직 어린이집 자리를 구할 수가 없어서 구할 때 까지 자기가 휴가를 내야 한다고. 또 다른 직장동료는 유치원 자리를 동네에 받지 못해 오후 네시에 차로 아이를 픽업해 집에 데려다 주고 다시 회사로 돌아온다. 그런 도시에서 우리는 어린이집과 유치원 자리를 비교적 수월하게 받았다.

어린이집에 보낼때는 내가 아직 학생이었어서 학생지원센터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집에 자리를 바로 받을 수 있었다. 원비는 일반 어린이집보다 좀 비쌌지만, 선생님들과 시설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러다 우리는 이사를 했고, 원래도 좀 멀었던 어린이집이(대학교 근처에 위치) 더 멀어졌다. 지하철을 타고 30분은 가야하는 거리. 아이에게는 지하철 안에서 간식을 먹는게 하나의 재미가 되었다. 이사갈 집이 정해졌을 때 부터 이미 이 동네 유치원에 지원을 했지만 10개월이 넘도록 답이 없었다. 이제는 적극적으로 지원활동(?)을 해야하나 싶을 때, 집 근처 유치원에서 전화가 왔다. 아이를 위한 자리가 있다고.

전화를 받은 다다음 날, 남편과 아이와 함께 유치원에 등록하러 갔다. 그게 12월이었고, 오늘은 오리엔테이션이 있는 날이었다. 2월에는 총 여섯명의 아이가 동시에 시작한다. 여섯 아이의 학부모와 아이 셋이 모였다. 그 자리에서도 우리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이 여섯명 중 두 명만이 어린이집에 다닌 경험이 있고, 만 네살이 넘도록 어떤 자리도 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유치원은 여러모로 어린이집보다 한 수 위였다. 어린이집 한 반 정원수는 10명, 선생님은 3명이었던데 비해, 유치원은 한 반 20명에 선생님 단 두 명. 어린이집에서는 그 세 명 중에도 우리 아이를 우선으로 담당하는 선생님 Bezugserzieherin이 한 명 정해져 있었는데, 유치원은 그런거 없다. 시간이 지나면 아이가 스스로 잘 맞는 선생님을 찾는다고. 적응기간도 다르다. 어린이집은 그 담당선생님과 나와 아이, 이렇게 셋이서만 며칠을 보냈었는데, 유치원은 바로 실전이다. 새로 들어가는 아이들 여섯이서 바로 합방. 가끔은 버스 타고 숲으로 소풍 가기도 한다고.

독일은 유치원부터 공교육으로 여긴다. 그래서 만 세살이 넘은 아이들을 필히 보육시설에 보내야 한다. 아이들은 유치원에서 다양한걸 접하겠지만, 내게 특히 반가웠던건 언어교육. 이 유치원에는 일주일에 두 번, 오전에 언어선생님이 방문한다. 처음에는 반에서 아이들과 같이 놀다가, 언어가 부족한(독일 아이나 이중언어)아이들 다섯명을 데려가 따로 시간을 갖는다. 단어나 발음을 직접 고쳐주거나 하지는 않고, 아이가 잘못 얘기 한 부분을 선생님이 바르게 다시 이야기하는 정도. 그렇지 않아도 딸의 독일어가 좀 걱정돼서 '집에서 독일어 영상을 좀 보여줄까' 싶던 차에 잘 되었다. 집에서는 한국어만 열심히 해도 되겠어. 

한 시간 정도 정보와 질문 교환이 끝나고, 시설을 한 번 둘러보는걸로 오리엔테이션은 끝났다. 마침 아이들 픽업시간이어서 다니고있던 아이들의 부모들을 우연히 만났는데, 아는 얼굴들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동네 초등학교 체육관에서 하는 수업을 듣고있는데, 거기에서 알게된 부모들이다. 남편은 그제야 얼굴이 좀 폈다. 픽업하고 다같이 바로 체육수업을 가면 되겠단다.

오리엔테이션 내내 수줍어서 아빠랑만 놀던 딸아이는 어땠을까? 저녁 먹기 전에 무릎에 앉혀 물어봤다.

"오늘 킨더가텐 어땠어?"

"안 좋았어."

"안 좋았어? 계속 놀고싶었는데 조금만 놀고 집에와서 안 좋았어?"

"응."

"우리 한 열 밤 정도 자면 이제 매일매일 킨더가텐 갈꺼야. 근데 그 땐 키타(어린이집)는 못 가. 키타나 킨더가텐 둘 중 하나만 갈 수 있어."

"나는 킨더가텐 갈래."

 


다음달이면 만 세 살이 되는 딸. 독일어와 한국어 둘 다 말한다. 그리고 두 언어의 전환이 놀랍다.
어제 저녁, 잠 들기 전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내가 ‘작다’라는 말을 잘 못 알아들었다. 잘 때엔 아직 쪽쪽이를 무는데, 물고 말하면 당연히 알아듣기 어렵다. ‘잡다? 접다?’하고 되 물으니, 쪽쪽이를 손으로 빼서 들고는 ‘클라인klein 이라고오!’ 한다.
한국어는 일취월장이라 가끔은 ‘언제 이런 표현을 배웠지?’ 할 정도. 요새 새로 사용하는 말은 ‘~하거나 ~하거나 둘 중 하나만 해’다. 며칠 전에 ‘밥을 먹든지 내려가 놀든지 둘 중 하나만 해’라고 한 말을 기억하고는, 엄마아빠가 자기랑 안 놀고 둘이서 얘기할 때 써먹는다. ‘구슬 하고 놀거나, 말 하거나 둘 중 하나만 해!’. 말 하겠다고 하는 대답은 당연히 안 통한다.
‘엄마아빠처럼 어른이 되면 뭐 하고싶어?’ 같은 심도있는(?) 질문에 대답도 한다. 처음 물어봤을 땐 ‘혼자서 양치하고싶어’였는데, 이젠 ‘맥주 마시고 싶’다고.
집에서는 98% 한국어를 사용한다. 2%는 독일어인데, 장난으로 독일어를 가끔 사용하곤 한다. 주로 아이가 먼저 독일어로 말을 걸고, 나는 장단을 맞춰주는 정도. 내 독일어로는 적극적으로 놀아주지 않아 재미가 없는지 오래 가진 않는다.

독일에서 출산하기로 결정하고 독일에서 출산한 한국 사람들의 후기를 많이 찾아 읽었다. 그리고 대강의 흐름을 상상했었다. 하지만 그 많은 후기 중에 나와 같은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처음부터 달랐다. 정기검진 하러 온 산부인과에서 구급차를 타고 출산병원에 간 후기는 없었으니까.

독일출산에서 가장 걱정스러웠던 건 아무래도 언어였다. 산부인과에 검진을 가서도 항상 새로운 단어를 맞닥트렸고, 내 몸에 나타난 변화를 설명하려면 일단 구글부터 켜야 했다. 임신 중에 독일어 스트레스를 추가로 받고 싶지 않아서 독일어로 된 출산 관련 책은 볼 생각도 하지 않았고, 인터넷에서 임신과 출산 시 꼭 필요한 단어 리스트 정도만 알고 있었다. 단어를 아는 것과 사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데, 출산할 때는 이 차이가 너무나 극명했다. 목소리를 입 밖으로 내는 것조차 힘들었으니까. 남편이 내 입 가까이에 귀를 대고 몇 번을 시도해서 내 의사를 조산사에게 전달하는 원초적인 시스템만 있을 뿐.

출산 후기들과 또 달랐던 건, 가능할 때까지 내 배에 CTG 선들이 연결돼 있었던 거다. 태아의 심박수 이상이 감지돼서 병원에 간 만큼, 심박수를 주기적으로 체크할 필요가 있었다. 내 기억으론 그 선들을 아이가 나올 때까지 달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고 어떻게 이 자세 저 자세를 취했는지 모를 일이다. 어느 순간 선을 떼어냈는데 내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잊으라고 해도 잊지 못할 것 같은 건, 아직 나오지 않은 아이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피를 뽑아 체내 산소 포화 정도를 확인한 거다. 아직 배에 있는 아이의 머리에, 아이가 나올 길을 거슬러 들어가 메스로 상처를 내고 피를 채취했다. 다섯 번. 아이는 2년이 지난 지금도 머리카락 사이에 다섯 개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진행이 더뎌지면 안 됐기에 무통주사(PDA)도 맞지 못했다.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의사가 이번 혈액 채취를 마지막으로 분만을 좀 더 시도해 보고 안되면 수술을 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걸 들었다. 그때 나는 뭐 어떤 결정을 할 뇌의 용량도 남아있지 않았다. 변비니 수박이니 하는 건 말도 안 되게 고상한 표현이다. 네가 죽거나 내가 죽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 이 고통이 끝나겠구나 생각하는 참이었으니.


그렇게 아이는 세상에 나왔다. 아이를 품에 안기 전 잠깐 숨을 고르는동안, 아이의 목에 감겨있던 탯줄을 돌려 풀었다. 세 바퀴나. 그렇다. 목에 감긴 탯줄이 심박수를 떨어뜨렸던 거다. CTG를 진행하는 그 40분 동안 이상이 감지됐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옆에서 출산과정을 모두 지켜본 남편은 아이가 나오자 감격한 듯 눈이 울렁울렁했다. 나야 제정신이 아니었다 치고, 맨 정신으로 그 과정을 지켜본 남편에겐 출산이 가감 없이 느껴졌나 보다. 출산 이후, 나는 두 번째 아이는 남자가 임신할 수 있을 때 가질 거라고 이야기했다.


아이가 나오고 남편이 탯줄을 잘랐다. 그리고 나에게 내 태반을 볼거냐고 물어봤다. 그땐 순간 놀라고 약간 무서운 마음에 보지 않겠다고 했는데, 아이를 무럭무럭 자라게 해 준 내 몸의 일부에게 그동안 수고했다고 작별인사 정도는 해줄걸 그랬다.

아이를 가슴에 안은채로 분만실 옆에 붙어있는 방으로 옮겨졌다. 비교적 편안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그 방에서 아이는 공식적으로 이름을 가졌다. 독일에서는 보통 출생하고 바로 아이 이름을 지어준다. 아이 얼굴을 보고 그 자리에서 바로 지을 수는 없으니 임신기간에 이름을 고민하고, 임신 후기쯤엔 잠정적인 이름을 부모가 정해놓는다. 하지만 지인에게 출산 전에 이름을 알리지는 않는다고.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이름을 갖는다는 건, 병원에서부터 간호사와 의사들이 아이에게 이름을 불러준다는 거다. 별 일이 없으면 잘 때도 엄마 침대 옆에 이동식 아기 침대를 붙여놓는 식으로 항상 같이 있지만, 검사를 받으러 가거나 수유 연습을 하거나 할 때 벌써부터 한 명의 고유한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대접을 받는 것이다.

한 시간 정도 후, 품에 안긴 아기와 남편과 함께 병실로 간다. 이제부터 초보 엄마 아빠의 본격적인 사투가 시작된다. 

예정일 3일 전 목요일, 산부인과 정기검진이 있는 날이다. 예정일 한 달 전 부터는 2주에 한 번 산부인과에 가서 CTG를 보고, 초음파 또는 내진을 본다. 내 경우는 태아의 크기가 평균보다 작아서 그 즈음엔 출산 할 병원에도 정기검진을 보러 갔으니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검진을 한 셈이다.

그 날 오전도 여느 검진때처럼 부른 배를 내놓고 모로 누워 아기의 심박수와 수축정도 등을 재고있었다. 보통 40분 정도 체크한다. 연결이 좋지 않아 측정이 잘 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기에 중간중간 간호사가 들어와 잘 기록되고 있는지 살펴본다. 그런데 중간에 들어온 간호사가 치수를 보더니 약간 긴장한 모습으로 의사를 부른다. 곧 들어온 의사가 보더니 응급차를 불러 출산병원으로 지금 가야한단다. 일반적 태아 심박수가 130-150 사이인데, 수치가 80 이하로 떨어진게 보였던거다. 언제나 차분하고 고상한 목소리의 의사선생님도 좀 긴장한 듯 보였으나, 그보다는 아이가 곧 나올 것이라는 기대섞인 흥분감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환자용 들것에 들려 나가는 나에게 친절한 웃음과 함께 걱정이 아닌 응원을 해 줬다.

통증도 없고, 양수가 터지거나 어디 불편한 것도 아닌데 나는 들것에 잘 동여매져 구급차에 태워졌고, 곧 출산할 병원에 도착했다. 피를 두 번 뽑고 CTG를 한 시간 정도 봤다. 중간에 아이가 잠들었는지 신호가 활발하지 않아서 아이를 깨운다며 레몬 오일을 한 방울 적신 천을 주며 코 밑에 대고있게 했다. 그래도 산부인과에서 봤던 것 같은 특별한건 보이지 않았다. 초음파도 보고 병실을 받았다. 그리고는 바로 유도분만을 시작했다. 별건 없었다. 오후에 알약 하나를 먹고 CTG 한 시간, 저녁에 또 알약 하나를 먹고 CTG 한 시간. 하지만 그날 밤 내내 통증이고 뭐고 아무 일이 없었다. 

아이가 나오면 남편은 두 달 동안 육아휴직을 내기로 했다. 그 말인 즉, 당장 내일이라도 아이가 나오면 남편은 더이상 회사에 가지 않는다는 얘기다. 아침에 지갑만 들고 산부인과를 갔다가 그 길로 입원한 나를 따라, 남편도 회사일을 제치고 서둘러 와야했다. 유도분만 알약을 먹었지만 정말 아무런 변화를 느낄 수 없었던 나는 걸어서 5분거리인 집에 15분은 걸려 가서 전에 챙겨둔 출산가방을 들고 병원으로 왔고, 남편도 다시 회사에 가서 일을 마무리하고 왔다.

고요한 병원 첫날 밤이 지나고 다음날 아침. 세 번째 알약을 먹고 CTG 한 시간을 했다. 그래도 뭐 별 반응이 없자 병원 내 산책을 추천했고, 병실로 돌아오자마자 양수가 터졌다. 이제부턴 또 다른 단계다. 8시간에 한 번 씩 혈액검사를 하고, 4시간에 한 번 씩 항생제를 투여한다. B군연쇄상구균 때문이다. 이 역시 출산 한 달 전 보험회사에서 부담해서 진행하는 검사로, 양성반응이 나와서 양수가 터지고 난 후 부터는 항생제를 꾸준히 맞아야 한다. 양수는 터졌지만 통증은 거의 없다. 오후 세 시에 네 번째 알약을 먹고 저녁 아홉시에 다섯 번째 알약을 먹는다. 그러자 슬슬 진통다운 진통이 오기 시작한다.


독일의 분만시스템은 이렇다. 부인과 진료를 보러가는 부인과전문클리닉이 있고, 출산을 할 수 있는 출산센터나 대형병원이 있다. 임신기간동안 체크를 받으러 다니는 산부인과는 사실 부인과이고, 그 곳에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출산을 앞둔 부모들은 어디에서 출산을 할 지 적극적으로 알아보고 선택해야한다.

슈투트가르트에는 큰 병원 네 곳, 그리고 그 외 몇몇 출산센터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다. (아이를 받을 수 있는 조산사를 집으로 불러 집에서 낳을 수도 있다.) 이 병원들에서는 정기적으로 인포아벤트Infoabend를 연다. 예비부모들을 상대로 병원의 출산 시스템, 철학, 자료, 입원실과 분만실까지 보여주고 질의응답을 하는 날이다. 여러 곳을 돌아보며 정보를 얻고 본인의 가치관에 맞는 출산병원을 선택할 수 있다.

나의 경우 집에서 버스 한 정거장 떨어진 곳에 출산 가능한 병원이 있었다. 그래서 딱히 다른 옵션을 고려하지 않기도 했지만, 인포아벤트에 가서 보니 가히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일단 독일 평균보다 자연분만율이 높았고, 병원측에서도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듯 했다. 무엇보다 신기했던건 분만실이었다. 총 세 개의 분만실이 있는데, 각 분만실은 세 개의 연결된 방으로 구성돼있었다. 가운데 가장 큰 방이 분만을 하는 방인데, 가운데는 침대나 굴욕의자가 아닌 변신하는 의자가 있었다. 출산에 가장 좋은 자세를 취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조작할 수 있단다. 오디오도 있어서 좋아하는 노래를 가지고 오면 틀어주기도 한다고. 연결된 방들은 각각 출산에 도움을 주는 방들 이었다. 왼쪽으로 연결 된 방에는 짐볼과 매트 등이 있었고, 오른쪽 방에는 수중분만이 가능한 욕조가 있었다.

이 모든것이 보험으로 처리가 된다. 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매일 입원비 10유로를 개인이 부담해야하고, 2인실 혹은 3인실이며, 보호자는 병원에서 같이 밤을 보낼 수 없다. 보호자가 항상 같이 있을 수 있는 가족실의 경우 하루에 150유로를 개인 부담 해야한다. 신생아실은 없고, 아이는 출산 직후부터 엄마와 함께 있는것이 원칙이다.


진통이 오고 언제부턴가 나는 분만실에 누워있었다. 남편도 눈을 좀 붙이라고 입원실로 보내고, 출산준비수업에서 배운 호흡법을 좀 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를 반복했다. 자정을 넘어서자 내 의지로 호흡법을 유지하는게 힘들어졌다. 간호사를 불러 남편을 불러달라고 했다. 열리는 문 뒤로 잠을 미처 다 떨쳐버리지 못한 남편의 얼굴이 보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멘탈이 나가는게 보였다. 그리고는 간호사에게 묻는걸 들었다.

"애가 지금 나오는거야?"

나는 그동안 얼마나 좋은 데엠을 가졌던가! 꽤 넓은 면적에 물건들이 일정 규칙에 따라 잘 정리 돼 있었고 오픈플랜으로 한 눈에 꽤 많이 파악할 수 있었다. 아기용품에 대해 얘기하자면 할 말이 더 많다. 모든 브랜드의 모든 크기의 기저귀가 다양한 포장규격으로 구비 돼 있었다. 아기옷도 저렴이부터 유기농까지의 선택권이 있었다. 내복도 있어서 응아가 샌 긴급 상황에 바로 계산해 입힐 수 있었다. 아 맞다. 기저귀 가는 곳도 널찍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않고 언제든 기저귀를 갈 수 있었다.

지금은 두 곳의 데엠에 어렵지않게 갈 수 있다. 새로 이사한 집 근처에서 걸어서 10분에 하나, 회사에서 집에 오는 전철역 근처에 하나. 하지만 둘 다 예전 데엠보다 좋은 점은 찾아볼 수 없다. 좁고, 정수기도 없고, 기저귀 가는데(는 이제 어차피 별 필요는 없지만)도 불편하고, 무엇보다 우리가 사던 팸퍼스 베이비드라이 점보팩이 없다! 좀 더 비싼 팸퍼스 프리미엄은 점보팩만 들어와 있고, 베이비드라이는 일반팩만 있다. 사이즈에 따라 한 팩에 들어있는 개수가 다른데, 지금 쓰는 사이즈는 일반팩으로 사면 30개가 들었다. 30개. 누구 코에 붙이나. 딸래미 엉덩이에 붙이지.

어린이집에서 기저귀가 더 필요하다고 해서 이번엔 아마존에서 주문 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주문 후 이틀이 지나도 배송조차 안돼서 취소하고 회사 근처 데엠에 갔다. 기저귀코너 앞에서 내 귀한 ‘퇴근 후 10분’을 소비하고 결국은 엉덩이에 붙일 일반팩 하나를 집어들었다. 기저귀 공급에 차질이 생겨 기저귀를 떼야 할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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