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택근무가 한 달에서 두 달로 넘어갈 무렵. 커피를 끊었습니다. 한번에 확 빼는 다이어트가 효율적이라는 이론에 대입해, 어느날 그냥 커피를 끊었습니다. 아침 출근시간 후, 점심 후 내려 마시던 커피는 디카페인 커피로 대체했습니다.
사흘은 정말 비몽사몽이었습니다. 첫 날은 남아있는 카페인 탓인지 그럭저럭 흘러갔는데 이틀째 되는 날, 점심을 먹자마자 식탁에서 졸기 시작합니다. 남편에게 아이를 부탁하고 침대에 쓰러져서는 내리 두 시간 낮잠을 잤습니다. 셋째날인 그 다음날은 오전에 한시간 반 낮잠을 잤습니다. 보통은 여섯시에 아이와 같이 일어나도 하루를 곧잘 지냈는데, 그 날은 여덟시에 남편과 육아 교대를 하고 꿀잠을 잔거죠. 재택근무 할 때 커피를 끊어서 참 다행입니다.
그렇게 사흘을 보내고 나니 마치 카페인 디톡스를 한 기분입니다. 그 전엔 깨어있어도 집중이 잘 안 된다고 느낄 때가 왕왕 있었는데, 이제는 나의 순간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느낌입니다. 잠이 늘어서 내 절대적인 시간은 줄었지만, 시간을 아껴 사용하는 느낌입니다. 그렇다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쓴다는 말은 아닙니다. 잉여의 기분을 충분히 느끼며 시간을 보냅니다.

'독일에서 _ > 살아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일 설계사무소 _ 재택근무 1, 2일차  (0) 2020.03.19
포크로 라면먹기  (2) 2020.01.30
쉬고싶다  (0) 2020.01.28
오늘 아침 기분이가 좋았던 일  (0) 2019.08.09
유튜브를 시작했습니다.  (0) 2019.07.02

홈오피스 1일 차

학교 휴교가 시작된 다음날인 3월18일부터 회사에서도 공식적으로 재택근무를 할 수 있게 했다.

아침에 출근해 홈오피스에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고, 팀원과 업무를 나누고, 파일들을 서버에서 내려받았다. 4 주 동안 학교가 쉬기 때문에, 홈오피스도 4주 후인 4월 18일 까지이다. 나는 이제 막 신입 딱지를 뗐기 때문에 팀장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데, 2-3주 집에서 일 할 수 있도록 넉넉한 일감을 받았다.

점심에 남편이 아이와 차를 타고 와 컴퓨터를 운반했다. 오후엔 내가 아이를 돌 볼 순서라 저녁때가 돼서야 컴퓨터 전원을 켰다. 회사에서 사용하던 세팅이 아닐것은 짐작했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제서야 회사에서 나눠준 지침들을 자세히 읽었다. 가장 중요한 캐드 프로그램 시리얼 번호를 겨우 찾아 입력했는데도 프로그램은 열리지 않았다. 첩첩산중. 일이란걸 언제 시작할 수 있으려나.

맥북프로를 곧 장만해야겠다고 마음이 굳었다. 앞으로도 종종 홈오피스 할 경우가 생길테니.


홈오피스 2일차

새벽같이 회사에 가서 못 가져온 파일들을 가져오려고 했다. 8시 10분 전에 회사에 도착했는데, 이미 층층마다 직원들이 있다. 다들 왜 왔냐는 반응.

회사에 내 컴퓨터가 없으니 오늘 오지 않을 확률이 제일 높은 사람의 컴퓨터를 켰다. 아, 그런데 마우스가 없잖아! 대부분이 홈오피스를 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들을 집에 들고갔나보다. 블루투스 마우스이니 다른 자리로 옮겨야 겠다.

아, 그런데 컴퓨터를 잘못 선택했다. 내가 쓰는 버전이 없는 컴퓨터다. 파일을 열어서 다른 확장자로 저장해서 가져가야 하는데, 다른 버전에서 열면 기존 데이터가 꼬일 가능성이 있다. 여기까지 오기에도 컴퓨터 담당자의 승인이 몇 번이나 필요했는데, 또 다른 컴퓨터에서 시도 할 수는 없다. 파일을 일단 그냥 가져가 보도록 하자.

집에서 외장하드를 가져왔는데, 뭔가 막혀있다. 지난번에 유에스비 가져왔을 땐 됐던 거 같은데, 내 기억력을 믿을 수는 없다. 그래서 하나씩 클라우드에 올리기로 했다. 작업파일 몇 개인데 업로드에만 40분이다. 조용히 커피를 내리러 간다.

최신 맥북 내가 사고야 만다, 진짜.

'독일에서 _ > 살아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커피를 끊었습니다  (0) 2020.05.06
포크로 라면먹기  (2) 2020.01.30
쉬고싶다  (0) 2020.01.28
오늘 아침 기분이가 좋았던 일  (0) 2019.08.09
유튜브를 시작했습니다.  (0) 2019.07.02

독일은 의외로 꼭 지키는 것들이 있다. (물론 독일사람 전부가 그러지는 않을 거 라는거, 나도 안다.) 예를들면 ‘운동화는 운동할 때만 신기’라던지, ‘머그컵Becher에 차가운 음료 마시지 않기’라던지.

이게 어떤 느낌인지 감이 잘 안 온다.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이 정도이지 않을까. ‘포크로 라면먹기’

나는 점심 도시락을 싸 다니는데, 가끔은 집에 점심거리가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옵션 중 하나는 라면이다. 봉지라면. 회사에서 큰 길을 따라 1분만 내려가면 아시아마트가 있다. 거기서 라면 한 봉지를 사온다.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면서 동시에 넓은 그릇에 면과 스프를 넣는다. 끓은 물을 그릇에 붓고 2-3분 전자렌지에 돌려준다. 중간에 한두번 저어주면 면이 골고루 익는다.

오늘은 평소 먹던 라면과 다른 라면을 골랐더니 너무 매웠다. 마실 물은 우리 층에 없어서, 우리 층 냉장고에 있는 우유를 꺼냈다. 찬장에는 마침 큰 유리컵들만 있어서 용량이 좀 적은 머그컵을 골랐다.

이로써 동시에 2관왕을 달성했다. ‘포크로 라면먹’으면서 ‘머그컵에 찬 우유 마시기’. 날이 따뜻했으면 테라스에 나가서 도시 뷰를 감상하며 먹는건데. 그러면 기분은 더 더 이상해질거다. 지금도 충분히 멀티쿨티multi-kulti다.

'독일에서 _ > 살아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커피를 끊었습니다  (0) 2020.05.06
독일 설계사무소 _ 재택근무 1, 2일차  (0) 2020.03.19
쉬고싶다  (0) 2020.01.28
오늘 아침 기분이가 좋았던 일  (0) 2019.08.09
유튜브를 시작했습니다.  (0) 2019.07.02


독일어 기사도 읽어야 하고, 독일어 작문도 해야한다. 요가도 틈틈이 해야하는데, 지난달에 간 신경외과에서 편두통을 없애려면 꾸준히 운동을 해야 한대서 압박이 더해졌다. 다음주는 아이가 유치원에 등원하는 날이다. 그 전에 지금 다니는 어린이집 작별파티도 해야하는데 이 역시 나의 몫. 생각 해 두었던 선생님과 아이들의 선물을 오늘 주문했다. 늦지 않게 오면 개별포장을 해야한다. 그리고 아이가 주문한 파인애플 머핀을 부족하지 않게 구워가야지. 아참, 그리고 한참을 업로드 하지 않은 내 유튜브 채널에 대한 죄책감과, 그것에 비례하지 않는 구독자 수 욕심도 있고. 꾸준히 글도 쓰고싶다.

이상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혹은 잠깐 스쳐 지나가는 할 것이라면, 회사는 회사 나름대로 빡빡하다. 나는 세 개 프로젝트에 속해 있는데, 그 중 둘은 지금 정신없이 건물이 올라가는 중. 하루에도 몇 번씩 프로젝트를 옮겨가며 급한 불을 끈다. 답변이 제깍 오지 않아 시간이 뜨면 틈틈이 세번 째 프로젝트 빔 모델링을 한다. 회사에서나마 나를 좀 돌보고 싶은데, 물은 지하에 있고 나는 엘리베이터 없는 3층이라, 커피만 내려 마신다.

뿌얘지는 눈을 껌뻑거리며 오후 업무시간을 채운다. 퇴근하는 지하철에서는 이북을 읽거나 유튜브를 시청하는 멍때리는 시간. 집에 도착하자마자 외투를 바닥이나 화장실 세탁기 위에 벗어두고는 샤워가 끝난 아이의 뒷일을 맡는다. 드라이기로 머리 말리는게 이 퀘스트의 핵심. ‘싫다고~’ 노래를 허허 웃어 넘기면서 손을 바쁘게 움직여야한다. 그 이후는 철저한 분업. 아이와 놀거나 저녁준비 하거나. 아이랑 놀거나 저녁상을 치우거나. 마지막 큰 산인 양치시키기를 넘으면, 이제 진짜 마지막. 잠 재우기.

오늘은 재우면서 같이 잠 들지 않았으니 반은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이가 미열이 있어서 잠에서 자꾸 깬다. 남편을 애 옆에 누워있게 하고, 요가를 하고 글을 쓴다.

'독일에서 _ > 살아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일 설계사무소 _ 재택근무 1, 2일차  (0) 2020.03.19
포크로 라면먹기  (2) 2020.01.30
오늘 아침 기분이가 좋았던 일  (0) 2019.08.09
유튜브를 시작했습니다.  (0) 2019.07.02
나는 왜 글을 쓸까  (1) 2019.05.03

딸을 어린이집 데려다 주고, 여느때처럼 버스를 타고 회사로 가는 길. 고개를 푹 숙이고 핸드폰을 보고있는데, 어떻게 그게 눈에 들어왔는지 모를일이다.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그들을 발견 한 일! 오늘은 흰 티셔츠에, 핑크색 테니스 스커트, 핑크색 발레슈즈를 똑같이, 똑.같.이 차려입은 금발의 할줌니 두 명을 발견했다. 예전 남편이랑 점심을 먹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처음 봤었고, 오늘은 두 번째. 남편이랑 같이 봤을 때도 옷 부터 가방, 악세서리까지 두 분이 꼭 같은 옷에 같은 포니테일을 하고있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띄었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레 웃음 근육이 움직였다. 그리고 확신했다. 그들은 연인이다! 남의 눈은 모르겠고, 내가 원하는대로 사랑하는 사람과 동일한 모습을 하고싶은 반짝반짝 빛나는 순수한 마음.

이렇게 빛나는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빛을 내뿜고 다니는 이 나라, 이 도시에서 나는 무엇이 걱정되어 마음의 근심을 떨쳐내지 못하는걸까.

'독일에서 _ > 살아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크로 라면먹기  (2) 2020.01.30
쉬고싶다  (0) 2020.01.28
유튜브를 시작했습니다.  (0) 2019.07.02
나는 왜 글을 쓸까  (1) 2019.05.03
독일 워킹맘의 열흘 휴가  (0) 2019.04.30

왠지 유튭 얘기만 꺼내면 존대말을 사용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의도적으로 티스토리 로그인을 하지 않았다. 글을 쓰지 않는게 왠지 죄책감이 들었고, 다른사람이 쓴 글을 본다는게 나의 못난 점을 깨달아 느끼게 하는 것 만 같았다.

그러던 와중에 유튜브를 하고싶었다. 그나마 간간이 쓰던 글을 중단하니, 어딘가에는 내 목소리를 내야 했던거 아닐까. 눈으로 한 자 한 자가 보이는 글 보다, 휙 지나가고 마는 말이 더 편하게 느껴진 건 아닐까. 요새 대세는 유튜븐데 나도 거기에 발을 담그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고. 너도나도 개인 채널을 여니, 내 얼굴 하나 보이는 것 쯤이야 군중속에 몸을 숨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하고싶어서 했다.

그리고 두 개의 동영상을 올리고, 이런저런 드는 생각은 역시 글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백만년만에 로그인을 했다.

회사에서 단순작업을 하면서 유튜브를 듣기 시작했다. 처음엔 노래로 시작했던것이 점점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채널로 옮겨갔다. 듣다보면 소리만 들리는 이야기도 있고, 문득 반짝하는 이야기도 있고. 오프라인에서 귀를 열어도 한 쪽 귀로 들어와 반대쪽 귀로 흘러 나가는 언어가 들리니, 어쨌든 모국어로 말하는 이어폰 속 사람의 목소리가 내 속에 들어왔다. 옛날 엄마가 라디오를 틀어놓고 일 하던 그 마음이 이랬을까. 그래서 나도 누군가에게 마음에 들어가는 목소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안정감 혹은 따뜻한 그 무언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완벽주의자라기 보다는, 굳이 말하자면 마감주의자인 나로써는 영상을 촬영하고 편집하는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 영상에서 말할 구조만 어느정도 짜두는게 제일 중요한 포인트. 아, 그리고 퇴근 후, 세수하고 다시 화장하는게 좀 번거롭다. 아이를 재우고 난 후에야 영상을 촬영할 수 있으니까.

한 번 업로드 한 영상은 다시 보지 않는다. 한 번 발행 한 글은 다시 보지 않는것과 마찬가지로. 편집하는 중에나 나를 자세히 들여다 보게 되는데, 요 근래에 이렇게나 나에게 집중한 시간이 있었나 싶다. 몰랐던 습관들도 알게되고, 긍정적인 피드백도 하게 된다. 나를 돌아보고 돌보는데 좋은 자극이 된다.

유튜브를 통해 완전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게 내가 유튜브를 하고싶었던 이유이지 않을까 싶을 만큼. 나름 오랜 시간 외국에서 살면서 남편과, 아이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는 호사를 누렸지만, 그와 동시에 새로운 인연에 대한 갈증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좁은 사회, 문 밖으로 한 발짝만 내 딛으면 맞닥트리는 모국이 아닌데에 대한 긴장감까지. 너무 오랫동안 움츠리고 있어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 얼굴을 모르는 사람에게 보인다는데에 망설임이 있었지만, 한 번 해보니 별거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너도 나도 얼굴을 보이며 댓글로 얘기하는게 익명성의 대안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글이 아닌 제가 궁금하신 당신, 유튭에서 엄마건축가를 검색하면 아마 나올겁니다. 이렇게 존대말로 마무리 :)

'독일에서 _ > 살아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쉬고싶다  (0) 2020.01.28
오늘 아침 기분이가 좋았던 일  (0) 2019.08.09
나는 왜 글을 쓸까  (1) 2019.05.03
독일 워킹맘의 열흘 휴가  (0) 2019.04.30
월요일 아침, 따뜻한 집  (0) 2019.03.25

나는 글을 써서 뭘 얻고 싶을까. 책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유시민 이사장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쓸모있는 사람이 되기위해 글을 쓴다고 한다. 이사장이기 전에 글 쓰는 사람이기도 한 유시민은 참혹한 과거 한가운데서 살아내던 그의 삶 속에서 ‘혹독한 글쓰기 훈련’을 받았다고 했다. 합수부 취조실에서, 도망다니던 반지하에서, 감금돼있던 독방에서, 맞지 않기위해, 돈을 벌기위해, 그 돈을 쓰기위해 글을 썼다. 그때만해도 작가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그 만큼 처절하게 글을 쓸 수는 당연히 없다. 그러나 조금 내 처지를 동정 해 보자면, 워킹맘에 독일어도 꾸준히 해야하는 상황에서 글을 쓰는걸 놓지 않으려 노력한다. 아니 오히려 이런 상황이 닥치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의 나는 책 읽기를 좋아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역사=외우는 것' 이라는 공식이 새기면서부터 소위 '역포자'가 되었다. 읽는것은 좋아했지만 역사적인 내용이 들어가면 읽히지 않았다. 자연스레 독서 편식이 생겼다. 재미 위주의 소설책을 주로 찾았다. 줄곧 내가 원하던 책을 구입해주던 엄마는 어느순간부터 독서를 지지하지 않았다. 엄마의 화장대에 새 책을 숨겨놓고 상으로 한 권씩 꺼내주었다.

고등학교 때나 대학 신입생 시절, 순수한 마음으로 진로를 고민할 때 내가 할 수 있는건 검색과 읽기였다. 내가 주로 의지했던건 내 선에서 검색하거나 찾아 읽어서 얻는 정보였는데, 꼬꼬마의 상황에서는 건축가가 도무지 어떻게 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 당시 방송피디 되는법에 대한 책을 읽은 기억이 있다. 피디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는 방법이 간략히 설명 돼 있고, 현직 피디들이 몇 마디 적은 책이었다. 당시 갓 입사한 신입사원 신분의 나영석피디의 글도 있었는데, 매우 쓰기 싫은데 선배가 시켜 억지로 적은 것 같은 느낌이었던게 기억난다.

그때부터 든 생각이었다. 건축가가 되는 법에 대한 글을 쓰자. 당시 내 나이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건축가가 말하는 건축가가 되는 법'을 내 깜냥이 되는 선에서 쓰고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거기에 더해 요즘은 '독일 건축가가 되는 법'도 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상상한다.

지금 내가 쓰는 글들은 건축가가 되는 법에 대해서도, 독일 건축가가 되는 법에 관한것도 아니다. 스파르타식 글쓰기 훈련은 더더욱 아니지만, 차분히 앉아 글을 쓰기 쉽지 않은 환경에서 나름 글쓰기 근육을 키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돈을 벌기위해 글을 써야하는것도 아니지만, 글을 쓰면 생각이 정리가 된다. 둥둥 떠다니다 뜬금없는 시간과 장소에서 나에게 들러붙는 먼지같은 생각의 조각을 싹싹 그러모아 카테고리를 분류하는 작업이다. Keep it simple. 살기위해 하는거다. '내'가 원하는 삶을.

열흘 휴가가 지나갔다. 독일의 바덴뷔템베르크 주는 부활절 앞, 뒤의 금요일과 월요일이 공휴일이다. 부활절을 중심으로 두 주는 학교들이 쉬는 방학이다. 딸의 어린이집은 부활절 이후 한 주동안 방학이어서 회사에 일주일 휴가를 냈다. 이 휴가는 초기, 중기, 말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는 지인 집으로 떠났던 3일. 휴양지 근처 가장 큰 도시이지만 정작 휴양지는 차타고 오가며 봤던게 다 였던. 지인집에서 죽치고 있었던 기간이었지만, 그래서 더 잘 쉬다 왔다.

긴 휴가 전 마지막 퇴근은 자리 정리도 제대로 못하고 파일 마무리도 제대로 못하고 하고, 뛰다시피 해서 원래 남편이 맡던 딸 픽업을 갔던 정도로. 시간을 쪼개서 쓰고 에너지와 집중도를 여기저기에 분배했어야 했던 시간 끝에 휴가를 얻었다. 남편의 여러 부분이 못마땅 해 보이고, 남편도 나에게 나름의 서운함이 쌓였던 상황에서, 우리를 나름 오래 봐 온 사람들과의 애정어린 수다가 건조한 마음에 잔잔히 비를 내려줬다.

휴가의 중기는 미뤄뒀던 집안일을 처리하던 기간. 볕 좋은 날 이불빨래도 하고, 꽃집에서 흙을 사서 분갈이도 해 주었다. 이사 후 새 집에 몬스테라와 산세베리아를 들였었는데, 무섭게 뻗어나가는 몬스테라와는 다르게 산세베리아는 자라지도 않고 새순도 올라오지 않아 새 흙을 넣어줘야겠다 생각했었다. 선인장용 흙을 사서 갈아주고, 그 김에 알로에베라도 큰 화분에 옮겨주고, 수경재배중이던 몬스테라도 화분에 옮겨심었다. 남편 사무실에 놓을 스투키, 보스턴고사리, 알로카시아, 하율이가 고른 타라 , 스킨답서스, 디펜바키아도 들여왔다.

여름에 친정부모님이 오시기로 했는데, 열흘 여행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렌터카를 예약했다. 숙소까지 예약하는게 목표였는데 실패. 원래 일주일 생각했던 일정이 열흘로 늘어나는바람에 기존에 두 도시에서 묵으려고 했던 계획도 세 도시로 바꼈고, 어디에 얼마나 묵는게 좋은지도 새로 계획해야 했기에 바로 예약할 수 없었다.

후기는 소셜활동기간이자 진짜 쉬는시간. 딸을 재우면서 같이 잠이 들지 않았던 밤에 한국영화 네 편을 보고, 한참 거리를 뒀던 예능도 하나 보았다.

친구들도 만나 수다 가득한 걸스나잇 한 번과 걸스오후 한 번을 가졌다. 평소 친구들을 만나려면 퇴근 후, 혹은 주말에 아이와 함께여야한다. 풀타임 워킹맘은 퇴근 후 아이가 자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하기에 주중은 패스. 아이와 함께 만나면 갈 수 있는 곳도 한정되고, 대화 집중도도 한참 떨어진다. 이러니 아이와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는 휴가기간에 친구를 만나면 죄책감도 덜 들고 온전히 내 시간을 보냈다는 만족감도 드니 일석이조. 한참 신나는 락을 들으며 기네스 생맥에 햄버거를 먹고, 자이언티 노래가 나오는 카페에서 플랫화이트와 치즈케익을 먹었다.

아이의 어린이집 친구도 약속을 잡고 만났다. 아이는 동네 어린이집에 다니는게 아니라 ‘어린이집 친구 = 동네 친구’가 아니다. 아직 친구들과 같이 놀 연령은 아니지만 공동육아는 언제나 독박육아보다 쉬우니까, 아이를 데려다주고 가끔 같은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다른 아이 엄마와 이번 연휴에 한 번 보기로하고 번호를 교환했었다. 독일 사람들도 ‘다음에 봐’하고는 소식 없는 경우가 많아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연락이 왔고, 동물들과 놀이터가 있는 공원에서 만났다.

평소에는 딸이 전혀 언급하지 않던 친구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웬걸. 만난다고 얘기한 후 부터 그 친구 이름으로 노래를 부르고, 친구가 탄다며 안타는 유모차까지 선뜻 올라탐. 만나서도 친구가 하는건 똑같이 따라하고, 혼자 놀다가도 친구 어디갔냐며 찾고. 너무 잘 놀아줘서 고마운 마음과, 이런 시간을 자주 만들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내가 친구를 만나러 갈 때도 같이 가자며 떼쓰다가도, ‘네가 친구를 만난 것 처럼 엄마도 친구 만나고 올게’ 했더니 급 이해하고 볼에 뽀뽀도 해주며 인사했다.

긴 연휴 후 돌아온 월요일. 매일 아침 신나게 들어가던 어린이집에선 나에게 다시 살짝 안겨 엄마랑 있고싶다 찡찡하고, 한참 지지고 볶았던 남편에게서 오늘따라 보고싶다 연락오고, 나도 괜히 사진첩을 뒤적이는. 민들레는 민들레인 월요일.

새벽 네시에 아이가 깼다. 영아시절 보통 기상시간이긴 했다만... 오늘은 엉엉 울면서 추피를 찾는다. 아이가 울어도 꿈쩍않는 남편을 깨워 거실에서 추피 책을 가져오게했다. 다섯 권을 읽는 동안 잠이 다 달아나버린 아이와 함께, 네시 반 부터 하루를 시작한다.

요 며칠은 아침 스트레칭으로 시작했지만 오늘은 불가능하니 패스. 다음 스케줄은 식기세척기 정리다. 부엌에 가니, 어제 새 집 손님맞이 흔적이 아직도 그대로다. 아이는 조리대에 앉아 남은 과자를 먹고, 나는 그 아래서 깨끗해진 접시들을 옮긴다.

집들이라고 부를 것도 없이 어제는 아주 간소했다. 남편은 저녁 떡국을, 나는 간식 머핀을 맡았다. 오전에 아이와 구운 바나나 초코 머핀에 차와 커피를 마시고 거기에 뜨거운 물 몇 번, 그리고 버터링 쿠키를 추가했다.

지난 달 아이 생일에 어린이집에 보낼 레인보우 머핀을 만들 때 머핀믹스 몇 박스를 사왔었다. 시판 믹스를 기본으로 색소를 추가해 만들었었다. 마트에 있는 바닐라 머핀 믹스는 초코칩이 든 것 밖에 없었어서 집에 초코칩만 몇 봉지 남아있었다. 그 후로 주말에 시간이 나면 아이와 초코 바나나머핀을 만들었다. 아이가 매일 한 입 만 먹고 남기는 냉장고에 보관중인 바나나들과 함께.

집에서 만든 머핀은 부푼게 유지되지 않고 폭신폭신하지 않은게 항상 문제다. 쫀득쫀득 한 식감도 뭐 나쁘진 않지만, 납작한 머핀은 예쁘지가 않잖아. 버터, 계란, 우유를 실온에도 놔둬보고, 가루류를 열심히 체 쳐 보기도 하고, 최대한 덜 저어보기도 했지만 딱히 차이점이 없었다. 베이킹파우더가 과하면 쓴 맛이 난다기에 그건 마지막 보루로 두었다가 어제 시도 해 보았다. 최소 세 개의 바나나가 필욘한데, 두 개 뿐이길래 설탕을 좀 더 넣었었다. 그게 쓴맛을 좀 덮어주길 바라며.

오븐에서 막 나온 머핀은 비주얼이 비슷하다. 노릇노릇 구워진 윗 면에 예쁘게 갈라진 노오란 틈이 보이는. 어제는 왠일로 식었는데도 많이 가라앉지 않았다. 손님이 오기 전에 아이와 남편과 앉아 두 개를 나눠 먹었는데, 속이 폭신폭신한게 아닌가! 나의 머핀 역사에 처음 있는 일. 속이 부드러우니
머핀 뚜껑이 바삭한게 더 두드러진다. “어떻게 한거야?” 남편이 물어본다. “나도 모르지... 다음번에도 바나나 두 개와 베이킹파우더 많이 레시피로 해 보긴 할게...”

머핀이 성공 한 덕분에 손님맞이 부담이 좀 줄었다. 그래도 집들이 선물, 아이에게 물려줄 옷을 바리바리 챙겨 오는 지인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기엔 너무나 부족했다. 고모, 이모, 삼촌, 오빠가 놀러오니 기분이 좋아진 아이는 손님이 가고 나서도 그 흥이 가라앉지 않아 어제 밤 늦게서야 잠이 들었고, 흐트러진 리듬 탓인지 그래서 이 새벽에 한 번 깬 것 같다.

과자를 먹고 아침을 먹겠다는 아이에게 시리얼을 우유에 말아줬는데, 몇 숟가락 먹더니 자러간단다. 쪽쪽이를 찾아 자는 아빠 옆으로 슬슬 간다. 다섯시 반. 혼자 자는가 싶더니 낑낑한다. 무릎에 눞혀 재운다. 깊게 잠든 것 같아 침대에 내려놓는다. 여섯시. 이렇게 한 주도 시작이다.

'독일에서 _ > 살아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왜 글을 쓸까  (1) 2019.05.03
독일 워킹맘의 열흘 휴가  (0) 2019.04.30
나와 너와 그와 우리의 밸런스  (0) 2019.03.19
나의 결심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0) 2019.03.09
행복하면 좋겠어  (0) 2019.02.27

아이 셋의 워킹맘이던 엄마는, 나의 공부를 당신이
그렇게 열심히 챙기셨다. 중학교 1학년때는 국사 시험공부를 같이 했고, 어느때까지는 수학도 직접 가르쳐 주셨다. 직접 가르쳐 주기가 버거워 질 학년 쯤에는 문제집 양을 정하고 체크하셨다.

시골 할머니 집에서 방학을 보내면서도 식탁에 앉아 수학 문제집을 풀고 있던 때, 아마 너무 양이 많아서 그랬던 듯 할머니 앞에서 엉엉 울어버렸다. 할머니도 선생님, 할아버지도 선생님, 엄마도 선생님이었던 탓(?)에 아무도 문제집을 푸는걸 뭐라 하지 않았던 환경이었지만, 그 때 만큼은 할머니가 엄마한테 한 소리 했던 것 같다. 나도 시간이 지나면 시어머니에게 아이의 교육에 대해 한 소리 들을 때가 올까.

엄마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그런 감정들은 나에게 이제는 다행히 지나간 감정이다. 요새는 아이 셋을 키우면서, 일도 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일일이 챙길 수 있었을까하는 놀라운 마음이 든다. 물론 당연히 그 때, 그리고 지금도 한국 엄마의 필수 덕목이었겠지만,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엄마랑 같이 맛집을 다녔을까, 같이 요리를 했을까, 같이 티비를 보며 깔깔댈 수 있었을까. 엄마와 나와의 갈등이 생기지 않았을까, 우리는 좀 더 친밀한 감정을 나눌 수 있었을까. 그 어느 가정도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내가 엄마의 입장이 되니 이런 생각도 다 든다. 그렇게 혹여나 생겼을 마음의 여유와 시간을 아빠와 함께 보낼 수 있었을까 하는.

아이가 하나임에도 나는 회사 일에, (76프로 정도는 남편이 하는)집안 일에, 육아에. 아이보다도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할 남편과, 지금 같이 할 시간과 에너지는 정작 부재한다. 누가 이 짐 좀 덜어주면 숨통이 트일 것 같다는 생각. 그러면 단정히 정리하며 살 수 있겠다는 생각. 불가능하기에 꾹꾹 눌러만 놓았던 그 생각들이 울컥 쏟아지려 한다.

아이와 시간을 온전히 보내려는 것이 욕심일까. 지금도 내 피곤함에 아이와 밀도있는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는 죄책감이 한 구석에 있는데. 그것도 나의 조바심일까. 나와 너와 그와 우리의 밸런스를 위해서 나는 욕심을 버리고 좀 더 자유로워져야 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독일에서 _ > 살아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일 워킹맘의 열흘 휴가  (0) 2019.04.30
월요일 아침, 따뜻한 집  (0) 2019.03.25
나의 결심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0) 2019.03.09
행복하면 좋겠어  (0) 2019.02.27
작년 말미에는,  (0) 2019.01.0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