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출산하기로 결정하고 독일에서 출산한 한국 사람들의 후기를 많이 찾아 읽었다. 그리고 대강의 흐름을 상상했었다. 하지만 그 많은 후기 중에 나와 같은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처음부터 달랐다. 정기검진 하러 온 산부인과에서 구급차를 타고 출산병원에 간 후기는 없었으니까.

독일출산에서 가장 걱정스러웠던 건 아무래도 언어였다. 산부인과에 검진을 가서도 항상 새로운 단어를 맞닥트렸고, 내 몸에 나타난 변화를 설명하려면 일단 구글부터 켜야 했다. 임신 중에 독일어 스트레스를 추가로 받고 싶지 않아서 독일어로 된 출산 관련 책은 볼 생각도 하지 않았고, 인터넷에서 임신과 출산 시 꼭 필요한 단어 리스트 정도만 알고 있었다. 단어를 아는 것과 사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데, 출산할 때는 이 차이가 너무나 극명했다. 목소리를 입 밖으로 내는 것조차 힘들었으니까. 남편이 내 입 가까이에 귀를 대고 몇 번을 시도해서 내 의사를 조산사에게 전달하는 원초적인 시스템만 있을 뿐.

출산 후기들과 또 달랐던 건, 가능할 때까지 내 배에 CTG 선들이 연결돼 있었던 거다. 태아의 심박수 이상이 감지돼서 병원에 간 만큼, 심박수를 주기적으로 체크할 필요가 있었다. 내 기억으론 그 선들을 아이가 나올 때까지 달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고 어떻게 이 자세 저 자세를 취했는지 모를 일이다. 어느 순간 선을 떼어냈는데 내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잊으라고 해도 잊지 못할 것 같은 건, 아직 나오지 않은 아이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피를 뽑아 체내 산소 포화 정도를 확인한 거다. 아직 배에 있는 아이의 머리에, 아이가 나올 길을 거슬러 들어가 메스로 상처를 내고 피를 채취했다. 다섯 번. 아이는 2년이 지난 지금도 머리카락 사이에 다섯 개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진행이 더뎌지면 안 됐기에 무통주사(PDA)도 맞지 못했다.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의사가 이번 혈액 채취를 마지막으로 분만을 좀 더 시도해 보고 안되면 수술을 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걸 들었다. 그때 나는 뭐 어떤 결정을 할 뇌의 용량도 남아있지 않았다. 변비니 수박이니 하는 건 말도 안 되게 고상한 표현이다. 네가 죽거나 내가 죽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 이 고통이 끝나겠구나 생각하는 참이었으니.


그렇게 아이는 세상에 나왔다. 아이를 품에 안기 전 잠깐 숨을 고르는동안, 아이의 목에 감겨있던 탯줄을 돌려 풀었다. 세 바퀴나. 그렇다. 목에 감긴 탯줄이 심박수를 떨어뜨렸던 거다. CTG를 진행하는 그 40분 동안 이상이 감지됐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옆에서 출산과정을 모두 지켜본 남편은 아이가 나오자 감격한 듯 눈이 울렁울렁했다. 나야 제정신이 아니었다 치고, 맨 정신으로 그 과정을 지켜본 남편에겐 출산이 가감 없이 느껴졌나 보다. 출산 이후, 나는 두 번째 아이는 남자가 임신할 수 있을 때 가질 거라고 이야기했다.


아이가 나오고 남편이 탯줄을 잘랐다. 그리고 나에게 내 태반을 볼거냐고 물어봤다. 그땐 순간 놀라고 약간 무서운 마음에 보지 않겠다고 했는데, 아이를 무럭무럭 자라게 해 준 내 몸의 일부에게 그동안 수고했다고 작별인사 정도는 해줄걸 그랬다.

아이를 가슴에 안은채로 분만실 옆에 붙어있는 방으로 옮겨졌다. 비교적 편안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그 방에서 아이는 공식적으로 이름을 가졌다. 독일에서는 보통 출생하고 바로 아이 이름을 지어준다. 아이 얼굴을 보고 그 자리에서 바로 지을 수는 없으니 임신기간에 이름을 고민하고, 임신 후기쯤엔 잠정적인 이름을 부모가 정해놓는다. 하지만 지인에게 출산 전에 이름을 알리지는 않는다고.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이름을 갖는다는 건, 병원에서부터 간호사와 의사들이 아이에게 이름을 불러준다는 거다. 별 일이 없으면 잘 때도 엄마 침대 옆에 이동식 아기 침대를 붙여놓는 식으로 항상 같이 있지만, 검사를 받으러 가거나 수유 연습을 하거나 할 때 벌써부터 한 명의 고유한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대접을 받는 것이다.

한 시간 정도 후, 품에 안긴 아기와 남편과 함께 병실로 간다. 이제부터 초보 엄마 아빠의 본격적인 사투가 시작된다. 

예정일 3일 전 목요일, 산부인과 정기검진이 있는 날이다. 예정일 한 달 전 부터는 2주에 한 번 산부인과에 가서 CTG를 보고, 초음파 또는 내진을 본다. 내 경우는 태아의 크기가 평균보다 작아서 그 즈음엔 출산 할 병원에도 정기검진을 보러 갔으니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검진을 한 셈이다.

그 날 오전도 여느 검진때처럼 부른 배를 내놓고 모로 누워 아기의 심박수와 수축정도 등을 재고있었다. 보통 40분 정도 체크한다. 연결이 좋지 않아 측정이 잘 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기에 중간중간 간호사가 들어와 잘 기록되고 있는지 살펴본다. 그런데 중간에 들어온 간호사가 치수를 보더니 약간 긴장한 모습으로 의사를 부른다. 곧 들어온 의사가 보더니 응급차를 불러 출산병원으로 지금 가야한단다. 일반적 태아 심박수가 130-150 사이인데, 수치가 80 이하로 떨어진게 보였던거다. 언제나 차분하고 고상한 목소리의 의사선생님도 좀 긴장한 듯 보였으나, 그보다는 아이가 곧 나올 것이라는 기대섞인 흥분감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환자용 들것에 들려 나가는 나에게 친절한 웃음과 함께 걱정이 아닌 응원을 해 줬다.

통증도 없고, 양수가 터지거나 어디 불편한 것도 아닌데 나는 들것에 잘 동여매져 구급차에 태워졌고, 곧 출산할 병원에 도착했다. 피를 두 번 뽑고 CTG를 한 시간 정도 봤다. 중간에 아이가 잠들었는지 신호가 활발하지 않아서 아이를 깨운다며 레몬 오일을 한 방울 적신 천을 주며 코 밑에 대고있게 했다. 그래도 산부인과에서 봤던 것 같은 특별한건 보이지 않았다. 초음파도 보고 병실을 받았다. 그리고는 바로 유도분만을 시작했다. 별건 없었다. 오후에 알약 하나를 먹고 CTG 한 시간, 저녁에 또 알약 하나를 먹고 CTG 한 시간. 하지만 그날 밤 내내 통증이고 뭐고 아무 일이 없었다. 

아이가 나오면 남편은 두 달 동안 육아휴직을 내기로 했다. 그 말인 즉, 당장 내일이라도 아이가 나오면 남편은 더이상 회사에 가지 않는다는 얘기다. 아침에 지갑만 들고 산부인과를 갔다가 그 길로 입원한 나를 따라, 남편도 회사일을 제치고 서둘러 와야했다. 유도분만 알약을 먹었지만 정말 아무런 변화를 느낄 수 없었던 나는 걸어서 5분거리인 집에 15분은 걸려 가서 전에 챙겨둔 출산가방을 들고 병원으로 왔고, 남편도 다시 회사에 가서 일을 마무리하고 왔다.

고요한 병원 첫날 밤이 지나고 다음날 아침. 세 번째 알약을 먹고 CTG 한 시간을 했다. 그래도 뭐 별 반응이 없자 병원 내 산책을 추천했고, 병실로 돌아오자마자 양수가 터졌다. 이제부턴 또 다른 단계다. 8시간에 한 번 씩 혈액검사를 하고, 4시간에 한 번 씩 항생제를 투여한다. B군연쇄상구균 때문이다. 이 역시 출산 한 달 전 보험회사에서 부담해서 진행하는 검사로, 양성반응이 나와서 양수가 터지고 난 후 부터는 항생제를 꾸준히 맞아야 한다. 양수는 터졌지만 통증은 거의 없다. 오후 세 시에 네 번째 알약을 먹고 저녁 아홉시에 다섯 번째 알약을 먹는다. 그러자 슬슬 진통다운 진통이 오기 시작한다.


독일의 분만시스템은 이렇다. 부인과 진료를 보러가는 부인과전문클리닉이 있고, 출산을 할 수 있는 출산센터나 대형병원이 있다. 임신기간동안 체크를 받으러 다니는 산부인과는 사실 부인과이고, 그 곳에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출산을 앞둔 부모들은 어디에서 출산을 할 지 적극적으로 알아보고 선택해야한다.

슈투트가르트에는 큰 병원 네 곳, 그리고 그 외 몇몇 출산센터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다. (아이를 받을 수 있는 조산사를 집으로 불러 집에서 낳을 수도 있다.) 이 병원들에서는 정기적으로 인포아벤트Infoabend를 연다. 예비부모들을 상대로 병원의 출산 시스템, 철학, 자료, 입원실과 분만실까지 보여주고 질의응답을 하는 날이다. 여러 곳을 돌아보며 정보를 얻고 본인의 가치관에 맞는 출산병원을 선택할 수 있다.

나의 경우 집에서 버스 한 정거장 떨어진 곳에 출산 가능한 병원이 있었다. 그래서 딱히 다른 옵션을 고려하지 않기도 했지만, 인포아벤트에 가서 보니 가히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일단 독일 평균보다 자연분만율이 높았고, 병원측에서도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듯 했다. 무엇보다 신기했던건 분만실이었다. 총 세 개의 분만실이 있는데, 각 분만실은 세 개의 연결된 방으로 구성돼있었다. 가운데 가장 큰 방이 분만을 하는 방인데, 가운데는 침대나 굴욕의자가 아닌 변신하는 의자가 있었다. 출산에 가장 좋은 자세를 취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조작할 수 있단다. 오디오도 있어서 좋아하는 노래를 가지고 오면 틀어주기도 한다고. 연결된 방들은 각각 출산에 도움을 주는 방들 이었다. 왼쪽으로 연결 된 방에는 짐볼과 매트 등이 있었고, 오른쪽 방에는 수중분만이 가능한 욕조가 있었다.

이 모든것이 보험으로 처리가 된다. 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매일 입원비 10유로를 개인이 부담해야하고, 2인실 혹은 3인실이며, 보호자는 병원에서 같이 밤을 보낼 수 없다. 보호자가 항상 같이 있을 수 있는 가족실의 경우 하루에 150유로를 개인 부담 해야한다. 신생아실은 없고, 아이는 출산 직후부터 엄마와 함께 있는것이 원칙이다.


진통이 오고 언제부턴가 나는 분만실에 누워있었다. 남편도 눈을 좀 붙이라고 입원실로 보내고, 출산준비수업에서 배운 호흡법을 좀 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를 반복했다. 자정을 넘어서자 내 의지로 호흡법을 유지하는게 힘들어졌다. 간호사를 불러 남편을 불러달라고 했다. 열리는 문 뒤로 잠을 미처 다 떨쳐버리지 못한 남편의 얼굴이 보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멘탈이 나가는게 보였다. 그리고는 간호사에게 묻는걸 들었다.

"애가 지금 나오는거야?"

나는 독일 유학중에 임신을 했고, 부른 채로 수업을 들었고, 학기 막바지에 출산을 했다. 출산 후엔 교수님 미팅하러 유모차를 끌고 학교에 갔고, 아이가 학교 복도를 기어다니는 옆에서 졸업논문 발표를 했다. 모든게 계획하지 않은 것이었으나, 사실은 계획 거였다. 나는 아이와 나의 나이차가 많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항상 있었고, 때가 괜찮은 라고 생각했다. 이후에 닥칠 일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없었을 .

식상하지만 사실이라 말하지 않고는 넘어갈 없는게, 많은 도움들이 있었기에 헤쳐나올 있었다. 가장 도움은 남편이었다. 물론 육아는 남편이 도와줘야 하는 아니라 같이해야 하는 거고, 내가 졸업할 있게 말이다.

여러 사정으로 인해 독일에서 친정엄마나 시어머니 도움 없이 출산을 , 남편은 달의 육아휴직Elternzeit 냈다. 한국보다야 복지가 좋은 독일이지만, 그래도 남자가 육아휴직을 길게 내는건 그리 보편적이지는 않다. 특히 건축 설계분야에서는, 그리고 소규모 아뜰리에에서는 더더욱.

남편의 육아휴직이 끝나고 학기가 시작했고, 나는 졸업설계를 다시 시작했다. 사실 임신했던 학기에 시작했으나 중간에 포기했었다.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호르몬에 대항해 이기지 못했고, 늦게까지 책상에 앉아있던 날이면 아이에게 미안함이 든다는 그럴듯한 핑계도 있었다. 다시 시작한 졸업설계의 목표는 만족할 결과가 아니라 졸업이었다. 학부 처럼 일을 새서 작업해놓고 발표 직전에 누구 들으라고 하는 투정이 아니라, 순도 100% 진심으로.

아이가 다행히 순했(과거형...)기에, 낮잠자는 때나 혼자 누워서 틈틈히, 그리고 남편이 퇴근한 저녁과 주말에 작업을 했다. 충분히 상상이 가능하겠지만, 학기 중반쯤 모든 것에 허덕이며 지내던 중에 남편이 달콤한 얘기를 했다. 졸업 까지 금요일을 쉬겠다는거였다. 독일은 한국보다 휴가가 많다. 때가 졸업발표가 남은 시점이었던가, 수로 따지면 충분히 가능했다. 어차피 여름 휴가를 내도 어디로 놀러 가지도 못하는데. 하지만 건축설계분야는 또한 다른 독일 회사들에 비해 짜다. 소규모 아뜰리에에서는 더더욱.

남편은 마감 직전 일주일 휴가도 내서 힘을 모아주고 장렬히 회사로 복귀하셨다. 그로부터 한국으로 휴가를 가기 까지는 아이의 이유식과 나의 끼니도 담당하셨다. 한국에 가서 나는 처음으로 34 자유부인이 되었다. 그것도 아예 다른 땅으로 떠날 있는 자유를 가진 부인이자 엄마. 자유를 남편은 참으로 쿨하게 동의 주었다.

어제 남편은 12 회사 워크샵을 다녀왔다. 남편이나 다른 가족 없이 아이와 둘이서만 보내는 밤은 처음이었다. 친구랑 어디 놀러가는 것도 아니고 회사 워크샵이라는데, 나는 쿨하게 보내주지 못했다. 당연하지. 이틀에 주말도 하루 있으니. , 남편은 짐도 안싸고 나와 아이가 먹을 파스타를 만들고 국을 끓였다. 남편이 집을 떠나기 전까지, 아이는 열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불확실함이 주는 두려움이 컸던거다. 그동안 육아의 힘듦이 1이었다면, 남편이 없으니 2 같았는데, 체감상 1.4 정도 였다. 아이는 미열이 있었지만 놀고 먹고 쌌다. 그리고 나는 나에대한 기대치를 줄였다. 밥은 있는거 먹이고, 힘들다 싶으면 애쓰지 않고 유투브 베이비시터님을 모셔왔다. 밖에서 시간을 보낼곳도 재미나 교육을 따지지 않고, 닿는대로, 아이 하는대로 내버려뒀다. 쓰고나서 보니 완전 남편 육아방식이다.

이제 육아의 두려움은 남편에게로 옮겨갔다. 남편 , 이제 육아의 책임이 자기에게 넘어온다고 막판에 버릇 나쁘게 들이지 말란다. 하루 그렇게 한건데, 잔소리를 한다. 역지사지다. 있음 본격 역할 바꾸기가 다가오는데, 나는 남편의 성취를 위해 나의 시간과 체력을 그렇게 떼어줄 수가 없을 같다. 퇴근 진심이 가득 담긴 위로 혹은 용기의 말을 충분히 전하는거, 그건 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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