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 기사도 읽어야 하고, 독일어 작문도 해야한다. 요가도 틈틈이 해야하는데, 지난달에 간 신경외과에서 편두통을 없애려면 꾸준히 운동을 해야 한대서 압박이 더해졌다. 다음주는 아이가 유치원에 등원하는 날이다. 그 전에 지금 다니는 어린이집 작별파티도 해야하는데 이 역시 나의 몫. 생각 해 두었던 선생님과 아이들의 선물을 오늘 주문했다. 늦지 않게 오면 개별포장을 해야한다. 그리고 아이가 주문한 파인애플 머핀을 부족하지 않게 구워가야지. 아참, 그리고 한참을 업로드 하지 않은 내 유튜브 채널에 대한 죄책감과, 그것에 비례하지 않는 구독자 수 욕심도 있고. 꾸준히 글도 쓰고싶다.

이상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혹은 잠깐 스쳐 지나가는 할 것이라면, 회사는 회사 나름대로 빡빡하다. 나는 세 개 프로젝트에 속해 있는데, 그 중 둘은 지금 정신없이 건물이 올라가는 중. 하루에도 몇 번씩 프로젝트를 옮겨가며 급한 불을 끈다. 답변이 제깍 오지 않아 시간이 뜨면 틈틈이 세번 째 프로젝트 빔 모델링을 한다. 회사에서나마 나를 좀 돌보고 싶은데, 물은 지하에 있고 나는 엘리베이터 없는 3층이라, 커피만 내려 마신다.

뿌얘지는 눈을 껌뻑거리며 오후 업무시간을 채운다. 퇴근하는 지하철에서는 이북을 읽거나 유튜브를 시청하는 멍때리는 시간. 집에 도착하자마자 외투를 바닥이나 화장실 세탁기 위에 벗어두고는 샤워가 끝난 아이의 뒷일을 맡는다. 드라이기로 머리 말리는게 이 퀘스트의 핵심. ‘싫다고~’ 노래를 허허 웃어 넘기면서 손을 바쁘게 움직여야한다. 그 이후는 철저한 분업. 아이와 놀거나 저녁준비 하거나. 아이랑 놀거나 저녁상을 치우거나. 마지막 큰 산인 양치시키기를 넘으면, 이제 진짜 마지막. 잠 재우기.

오늘은 재우면서 같이 잠 들지 않았으니 반은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이가 미열이 있어서 잠에서 자꾸 깬다. 남편을 애 옆에 누워있게 하고, 요가를 하고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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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육시설 운은 정말 좋다. 내가 사는 슈투트가르트는 정말이지 보육시설 자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내 직장에는 출산 후 일주일에 단 몇시간이라도 일을 하고싶어하는 동료가 있다. 출산 6개월 후 일주일에 며칠 출근하는가 싶더니, 다시 휴직에 들어갔다. 그동안은 부모님이 낮동안 아이를 맡아주셨는데, 아직 어린이집 자리를 구할 수가 없어서 구할 때 까지 자기가 휴가를 내야 한다고. 또 다른 직장동료는 유치원 자리를 동네에 받지 못해 오후 네시에 차로 아이를 픽업해 집에 데려다 주고 다시 회사로 돌아온다. 그런 도시에서 우리는 어린이집과 유치원 자리를 비교적 수월하게 받았다.

어린이집에 보낼때는 내가 아직 학생이었어서 학생지원센터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집에 자리를 바로 받을 수 있었다. 원비는 일반 어린이집보다 좀 비쌌지만, 선생님들과 시설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러다 우리는 이사를 했고, 원래도 좀 멀었던 어린이집이(대학교 근처에 위치) 더 멀어졌다. 지하철을 타고 30분은 가야하는 거리. 아이에게는 지하철 안에서 간식을 먹는게 하나의 재미가 되었다. 이사갈 집이 정해졌을 때 부터 이미 이 동네 유치원에 지원을 했지만 10개월이 넘도록 답이 없었다. 이제는 적극적으로 지원활동(?)을 해야하나 싶을 때, 집 근처 유치원에서 전화가 왔다. 아이를 위한 자리가 있다고.

전화를 받은 다다음 날, 남편과 아이와 함께 유치원에 등록하러 갔다. 그게 12월이었고, 오늘은 오리엔테이션이 있는 날이었다. 2월에는 총 여섯명의 아이가 동시에 시작한다. 여섯 아이의 학부모와 아이 셋이 모였다. 그 자리에서도 우리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이 여섯명 중 두 명만이 어린이집에 다닌 경험이 있고, 만 네살이 넘도록 어떤 자리도 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유치원은 여러모로 어린이집보다 한 수 위였다. 어린이집 한 반 정원수는 10명, 선생님은 3명이었던데 비해, 유치원은 한 반 20명에 선생님 단 두 명. 어린이집에서는 그 세 명 중에도 우리 아이를 우선으로 담당하는 선생님 Bezugserzieherin이 한 명 정해져 있었는데, 유치원은 그런거 없다. 시간이 지나면 아이가 스스로 잘 맞는 선생님을 찾는다고. 적응기간도 다르다. 어린이집은 그 담당선생님과 나와 아이, 이렇게 셋이서만 며칠을 보냈었는데, 유치원은 바로 실전이다. 새로 들어가는 아이들 여섯이서 바로 합방. 가끔은 버스 타고 숲으로 소풍 가기도 한다고.

독일은 유치원부터 공교육으로 여긴다. 그래서 만 세살이 넘은 아이들을 필히 보육시설에 보내야 한다. 아이들은 유치원에서 다양한걸 접하겠지만, 내게 특히 반가웠던건 언어교육. 이 유치원에는 일주일에 두 번, 오전에 언어선생님이 방문한다. 처음에는 반에서 아이들과 같이 놀다가, 언어가 부족한(독일 아이나 이중언어)아이들 다섯명을 데려가 따로 시간을 갖는다. 단어나 발음을 직접 고쳐주거나 하지는 않고, 아이가 잘못 얘기 한 부분을 선생님이 바르게 다시 이야기하는 정도. 그렇지 않아도 딸의 독일어가 좀 걱정돼서 '집에서 독일어 영상을 좀 보여줄까' 싶던 차에 잘 되었다. 집에서는 한국어만 열심히 해도 되겠어. 

한 시간 정도 정보와 질문 교환이 끝나고, 시설을 한 번 둘러보는걸로 오리엔테이션은 끝났다. 마침 아이들 픽업시간이어서 다니고있던 아이들의 부모들을 우연히 만났는데, 아는 얼굴들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동네 초등학교 체육관에서 하는 수업을 듣고있는데, 거기에서 알게된 부모들이다. 남편은 그제야 얼굴이 좀 폈다. 픽업하고 다같이 바로 체육수업을 가면 되겠단다.

오리엔테이션 내내 수줍어서 아빠랑만 놀던 딸아이는 어땠을까? 저녁 먹기 전에 무릎에 앉혀 물어봤다.

"오늘 킨더가텐 어땠어?"

"안 좋았어."

"안 좋았어? 계속 놀고싶었는데 조금만 놀고 집에와서 안 좋았어?"

"응."

"우리 한 열 밤 정도 자면 이제 매일매일 킨더가텐 갈꺼야. 근데 그 땐 키타(어린이집)는 못 가. 키타나 킨더가텐 둘 중 하나만 갈 수 있어."

"나는 킨더가텐 갈래."

 


매일 독일어 공부를 한지 3일째다. 매우 뿌듯하다. 3일 연속 혼자 독일어 공부를 하다니!

독일에 사는 나에게 ‘독일어 공부하기’는 생각만으로도 지긋지긋한 관계다.동의어로 ‘운동해야지’, ‘살 빼야지’가 있다. 아무튼 그런 찝찝한 관계를 2020년엔 청산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고싶었다. 가장 큰 이유는 올 해 10월에 회사 재계약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2년짜리 말하자면 계약직이다. 그 2년이 2020년 9월이면 끝나고 10월이면 새로운 계약을 맺게된다. 별 일 없으면 정규직으로. 1년 좀 넘게 회사를 다니면서 일 뿐 아니라 독일어도 많이 늘었다. 나는 잘 몰라도 이해하는 척을 잘 하고, 발음이 좋다는 장점이 있다. 단점은 어휘량이 적고, 엉망진창인 문법으로 말한다는거다. 물론 원어민이 아니니 문법을 다 맞게 얘기할 수 없다는건 안다. 두려워 하지 않고 말을 뱉어야 하는 것도 알고. 하지만 일 한지 2년이 지났는데도 느낌적인 느낌에 의지해 내 생각을 전달하려고 한다? 전혀 프로페셔널 하지 않다. 독일어로도 주장과 근거를 젠틀하게 제시하며 내 의견을 내고싶다구!
지금까지 해온 독일어 공부로 여기까지 왔다. 병원 예약 잡는게 두렵지 않고, 환자 대기실에서 오늘 할 말을 부랴부랴 독일어로 찾아보지 않는다. 7년 독일어 짬밥이면 이정도는 해야지 하는 정도. 건축주나 협력업체를 만나 회의다운 회의를 하려면 짬밥말고 다른게 필요하다.
그래서 결심했다. 고등학교 때 공부하듯 공부하자. 마냥 엉덩이를 붙이고 있자. 효율, 그딴건 잊어버리자. 지금까지 효율있는 독일어공부를 했는데 만족스럽지 않았으니, 이젠 엉덩이 힘으로 승부를 볼 때다. 아이를 재우고 꼭 다시 책상에 앉은지 3일째다. 첫 날은 앉아있던 두 시간 중 한시간 반은 집중해서 독일어를 봤다. 75% 승률. 둘째날은 두 시간 중 한 시간? 그래, 50%. 어제도 그 비슷하다. 핸드폰이 문제다. (나는 문제가 없다.) 단어를 찾으려고 핸드폰을 열면, 그 순간 어떤 단어를 찾으려고 했는지, 내가 하려고 했던게 뭔지, 여긴 어딘지 나는 누군지 홀랑 잊는다. 그러고는 손가락이 향하는대로 페이스북과 카카오톡을 뒤진다. 그러다 남편이 내는 부스럭 소리에 부리나케, 그러나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핸드폰을 책상에 내려놓는다. 아참, 단어 찾으려고 했었지! 그 단어가 어디있더라... 손으로 알파벳을 훑는다.

2020년 내가 선택한 독일어 공부법을 소개한다. 유튜브가 새해를 맞아 나에게 보여준 영어공부법 영상을 응용한거다.
1. 독일어 책을 하나 정한다. 신문기사도 좋지만, 찾는데 매 번 힘을 들이기 싫었다. 내가 정한 책은 한국에도 ‘이중언어 아이들의 도전’으로 번역된 책. 한글로 읽었는데 내용이 좋았다. 언어가 어떻게 아이들에게 인지되고 사용되는지 알 수 있다. 아이 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적용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독일어 공부 뿐 아니라, 언어 공부를 효율적으로(또 나왔다, 효율...) 할 수 있는 법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2. 손으로 옮겨 쓴다. 노트를 길게 반으로 접고 그 왼쪽에다. 문장을 외워서 옮기면 내가 잘 모르는 문법이나 구문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아직은 구문으로 끊어서 외워 옮기는 수준.
3. 노트 오른쪽에다 모르는 단어, 중요한 숙어, 문장구조 등을 적는다. 더 알고싶은 부분(예문이나 비교 단어 등)도 적어둔다.
4. 오늘 본 부분을 원어민인척 읽어본다.
5. 배운 단어를 활용해 작문도 하라는데, 이건 힘이 좀 더 드는 일이므로 일단 패스.


다음달이면 만 세 살이 되는 딸. 독일어와 한국어 둘 다 말한다. 그리고 두 언어의 전환이 놀랍다.
어제 저녁, 잠 들기 전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내가 ‘작다’라는 말을 잘 못 알아들었다. 잘 때엔 아직 쪽쪽이를 무는데, 물고 말하면 당연히 알아듣기 어렵다. ‘잡다? 접다?’하고 되 물으니, 쪽쪽이를 손으로 빼서 들고는 ‘클라인klein 이라고오!’ 한다.
한국어는 일취월장이라 가끔은 ‘언제 이런 표현을 배웠지?’ 할 정도. 요새 새로 사용하는 말은 ‘~하거나 ~하거나 둘 중 하나만 해’다. 며칠 전에 ‘밥을 먹든지 내려가 놀든지 둘 중 하나만 해’라고 한 말을 기억하고는, 엄마아빠가 자기랑 안 놀고 둘이서 얘기할 때 써먹는다. ‘구슬 하고 놀거나, 말 하거나 둘 중 하나만 해!’. 말 하겠다고 하는 대답은 당연히 안 통한다.
‘엄마아빠처럼 어른이 되면 뭐 하고싶어?’ 같은 심도있는(?) 질문에 대답도 한다. 처음 물어봤을 땐 ‘혼자서 양치하고싶어’였는데, 이젠 ‘맥주 마시고 싶’다고.
집에서는 98% 한국어를 사용한다. 2%는 독일어인데, 장난으로 독일어를 가끔 사용하곤 한다. 주로 아이가 먼저 독일어로 말을 걸고, 나는 장단을 맞춰주는 정도. 내 독일어로는 적극적으로 놀아주지 않아 재미가 없는지 오래 가진 않는다.

딸을 어린이집 데려다 주고, 여느때처럼 버스를 타고 회사로 가는 길. 고개를 푹 숙이고 핸드폰을 보고있는데, 어떻게 그게 눈에 들어왔는지 모를일이다.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그들을 발견 한 일! 오늘은 흰 티셔츠에, 핑크색 테니스 스커트, 핑크색 발레슈즈를 똑같이, 똑.같.이 차려입은 금발의 할줌니 두 명을 발견했다. 예전 남편이랑 점심을 먹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처음 봤었고, 오늘은 두 번째. 남편이랑 같이 봤을 때도 옷 부터 가방, 악세서리까지 두 분이 꼭 같은 옷에 같은 포니테일을 하고있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띄었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레 웃음 근육이 움직였다. 그리고 확신했다. 그들은 연인이다! 남의 눈은 모르겠고, 내가 원하는대로 사랑하는 사람과 동일한 모습을 하고싶은 반짝반짝 빛나는 순수한 마음.

이렇게 빛나는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빛을 내뿜고 다니는 이 나라, 이 도시에서 나는 무엇이 걱정되어 마음의 근심을 떨쳐내지 못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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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유튭 얘기만 꺼내면 존대말을 사용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의도적으로 티스토리 로그인을 하지 않았다. 글을 쓰지 않는게 왠지 죄책감이 들었고, 다른사람이 쓴 글을 본다는게 나의 못난 점을 깨달아 느끼게 하는 것 만 같았다.

그러던 와중에 유튜브를 하고싶었다. 그나마 간간이 쓰던 글을 중단하니, 어딘가에는 내 목소리를 내야 했던거 아닐까. 눈으로 한 자 한 자가 보이는 글 보다, 휙 지나가고 마는 말이 더 편하게 느껴진 건 아닐까. 요새 대세는 유튜븐데 나도 거기에 발을 담그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고. 너도나도 개인 채널을 여니, 내 얼굴 하나 보이는 것 쯤이야 군중속에 몸을 숨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하고싶어서 했다.

그리고 두 개의 동영상을 올리고, 이런저런 드는 생각은 역시 글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백만년만에 로그인을 했다.

회사에서 단순작업을 하면서 유튜브를 듣기 시작했다. 처음엔 노래로 시작했던것이 점점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채널로 옮겨갔다. 듣다보면 소리만 들리는 이야기도 있고, 문득 반짝하는 이야기도 있고. 오프라인에서 귀를 열어도 한 쪽 귀로 들어와 반대쪽 귀로 흘러 나가는 언어가 들리니, 어쨌든 모국어로 말하는 이어폰 속 사람의 목소리가 내 속에 들어왔다. 옛날 엄마가 라디오를 틀어놓고 일 하던 그 마음이 이랬을까. 그래서 나도 누군가에게 마음에 들어가는 목소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안정감 혹은 따뜻한 그 무언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완벽주의자라기 보다는, 굳이 말하자면 마감주의자인 나로써는 영상을 촬영하고 편집하는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 영상에서 말할 구조만 어느정도 짜두는게 제일 중요한 포인트. 아, 그리고 퇴근 후, 세수하고 다시 화장하는게 좀 번거롭다. 아이를 재우고 난 후에야 영상을 촬영할 수 있으니까.

한 번 업로드 한 영상은 다시 보지 않는다. 한 번 발행 한 글은 다시 보지 않는것과 마찬가지로. 편집하는 중에나 나를 자세히 들여다 보게 되는데, 요 근래에 이렇게나 나에게 집중한 시간이 있었나 싶다. 몰랐던 습관들도 알게되고, 긍정적인 피드백도 하게 된다. 나를 돌아보고 돌보는데 좋은 자극이 된다.

유튜브를 통해 완전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게 내가 유튜브를 하고싶었던 이유이지 않을까 싶을 만큼. 나름 오랜 시간 외국에서 살면서 남편과, 아이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는 호사를 누렸지만, 그와 동시에 새로운 인연에 대한 갈증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좁은 사회, 문 밖으로 한 발짝만 내 딛으면 맞닥트리는 모국이 아닌데에 대한 긴장감까지. 너무 오랫동안 움츠리고 있어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 얼굴을 모르는 사람에게 보인다는데에 망설임이 있었지만, 한 번 해보니 별거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너도 나도 얼굴을 보이며 댓글로 얘기하는게 익명성의 대안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글이 아닌 제가 궁금하신 당신, 유튭에서 엄마건축가를 검색하면 아마 나올겁니다. 이렇게 존대말로 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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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을 써서 뭘 얻고 싶을까. 책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유시민 이사장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쓸모있는 사람이 되기위해 글을 쓴다고 한다. 이사장이기 전에 글 쓰는 사람이기도 한 유시민은 참혹한 과거 한가운데서 살아내던 그의 삶 속에서 ‘혹독한 글쓰기 훈련’을 받았다고 했다. 합수부 취조실에서, 도망다니던 반지하에서, 감금돼있던 독방에서, 맞지 않기위해, 돈을 벌기위해, 그 돈을 쓰기위해 글을 썼다. 그때만해도 작가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그 만큼 처절하게 글을 쓸 수는 당연히 없다. 그러나 조금 내 처지를 동정 해 보자면, 워킹맘에 독일어도 꾸준히 해야하는 상황에서 글을 쓰는걸 놓지 않으려 노력한다. 아니 오히려 이런 상황이 닥치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의 나는 책 읽기를 좋아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역사=외우는 것' 이라는 공식이 새기면서부터 소위 '역포자'가 되었다. 읽는것은 좋아했지만 역사적인 내용이 들어가면 읽히지 않았다. 자연스레 독서 편식이 생겼다. 재미 위주의 소설책을 주로 찾았다. 줄곧 내가 원하던 책을 구입해주던 엄마는 어느순간부터 독서를 지지하지 않았다. 엄마의 화장대에 새 책을 숨겨놓고 상으로 한 권씩 꺼내주었다.

고등학교 때나 대학 신입생 시절, 순수한 마음으로 진로를 고민할 때 내가 할 수 있는건 검색과 읽기였다. 내가 주로 의지했던건 내 선에서 검색하거나 찾아 읽어서 얻는 정보였는데, 꼬꼬마의 상황에서는 건축가가 도무지 어떻게 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 당시 방송피디 되는법에 대한 책을 읽은 기억이 있다. 피디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는 방법이 간략히 설명 돼 있고, 현직 피디들이 몇 마디 적은 책이었다. 당시 갓 입사한 신입사원 신분의 나영석피디의 글도 있었는데, 매우 쓰기 싫은데 선배가 시켜 억지로 적은 것 같은 느낌이었던게 기억난다.

그때부터 든 생각이었다. 건축가가 되는 법에 대한 글을 쓰자. 당시 내 나이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건축가가 말하는 건축가가 되는 법'을 내 깜냥이 되는 선에서 쓰고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거기에 더해 요즘은 '독일 건축가가 되는 법'도 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상상한다.

지금 내가 쓰는 글들은 건축가가 되는 법에 대해서도, 독일 건축가가 되는 법에 관한것도 아니다. 스파르타식 글쓰기 훈련은 더더욱 아니지만, 차분히 앉아 글을 쓰기 쉽지 않은 환경에서 나름 글쓰기 근육을 키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돈을 벌기위해 글을 써야하는것도 아니지만, 글을 쓰면 생각이 정리가 된다. 둥둥 떠다니다 뜬금없는 시간과 장소에서 나에게 들러붙는 먼지같은 생각의 조각을 싹싹 그러모아 카테고리를 분류하는 작업이다. Keep it simple. 살기위해 하는거다. '내'가 원하는 삶을.

열흘 휴가가 지나갔다. 독일의 바덴뷔템베르크 주는 부활절 앞, 뒤의 금요일과 월요일이 공휴일이다. 부활절을 중심으로 두 주는 학교들이 쉬는 방학이다. 딸의 어린이집은 부활절 이후 한 주동안 방학이어서 회사에 일주일 휴가를 냈다. 이 휴가는 초기, 중기, 말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는 지인 집으로 떠났던 3일. 휴양지 근처 가장 큰 도시이지만 정작 휴양지는 차타고 오가며 봤던게 다 였던. 지인집에서 죽치고 있었던 기간이었지만, 그래서 더 잘 쉬다 왔다.

긴 휴가 전 마지막 퇴근은 자리 정리도 제대로 못하고 파일 마무리도 제대로 못하고 하고, 뛰다시피 해서 원래 남편이 맡던 딸 픽업을 갔던 정도로. 시간을 쪼개서 쓰고 에너지와 집중도를 여기저기에 분배했어야 했던 시간 끝에 휴가를 얻었다. 남편의 여러 부분이 못마땅 해 보이고, 남편도 나에게 나름의 서운함이 쌓였던 상황에서, 우리를 나름 오래 봐 온 사람들과의 애정어린 수다가 건조한 마음에 잔잔히 비를 내려줬다.

휴가의 중기는 미뤄뒀던 집안일을 처리하던 기간. 볕 좋은 날 이불빨래도 하고, 꽃집에서 흙을 사서 분갈이도 해 주었다. 이사 후 새 집에 몬스테라와 산세베리아를 들였었는데, 무섭게 뻗어나가는 몬스테라와는 다르게 산세베리아는 자라지도 않고 새순도 올라오지 않아 새 흙을 넣어줘야겠다 생각했었다. 선인장용 흙을 사서 갈아주고, 그 김에 알로에베라도 큰 화분에 옮겨주고, 수경재배중이던 몬스테라도 화분에 옮겨심었다. 남편 사무실에 놓을 스투키, 보스턴고사리, 알로카시아, 하율이가 고른 타라 , 스킨답서스, 디펜바키아도 들여왔다.

여름에 친정부모님이 오시기로 했는데, 열흘 여행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렌터카를 예약했다. 숙소까지 예약하는게 목표였는데 실패. 원래 일주일 생각했던 일정이 열흘로 늘어나는바람에 기존에 두 도시에서 묵으려고 했던 계획도 세 도시로 바꼈고, 어디에 얼마나 묵는게 좋은지도 새로 계획해야 했기에 바로 예약할 수 없었다.

후기는 소셜활동기간이자 진짜 쉬는시간. 딸을 재우면서 같이 잠이 들지 않았던 밤에 한국영화 네 편을 보고, 한참 거리를 뒀던 예능도 하나 보았다.

친구들도 만나 수다 가득한 걸스나잇 한 번과 걸스오후 한 번을 가졌다. 평소 친구들을 만나려면 퇴근 후, 혹은 주말에 아이와 함께여야한다. 풀타임 워킹맘은 퇴근 후 아이가 자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하기에 주중은 패스. 아이와 함께 만나면 갈 수 있는 곳도 한정되고, 대화 집중도도 한참 떨어진다. 이러니 아이와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는 휴가기간에 친구를 만나면 죄책감도 덜 들고 온전히 내 시간을 보냈다는 만족감도 드니 일석이조. 한참 신나는 락을 들으며 기네스 생맥에 햄버거를 먹고, 자이언티 노래가 나오는 카페에서 플랫화이트와 치즈케익을 먹었다.

아이의 어린이집 친구도 약속을 잡고 만났다. 아이는 동네 어린이집에 다니는게 아니라 ‘어린이집 친구 = 동네 친구’가 아니다. 아직 친구들과 같이 놀 연령은 아니지만 공동육아는 언제나 독박육아보다 쉬우니까, 아이를 데려다주고 가끔 같은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다른 아이 엄마와 이번 연휴에 한 번 보기로하고 번호를 교환했었다. 독일 사람들도 ‘다음에 봐’하고는 소식 없는 경우가 많아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연락이 왔고, 동물들과 놀이터가 있는 공원에서 만났다.

평소에는 딸이 전혀 언급하지 않던 친구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웬걸. 만난다고 얘기한 후 부터 그 친구 이름으로 노래를 부르고, 친구가 탄다며 안타는 유모차까지 선뜻 올라탐. 만나서도 친구가 하는건 똑같이 따라하고, 혼자 놀다가도 친구 어디갔냐며 찾고. 너무 잘 놀아줘서 고마운 마음과, 이런 시간을 자주 만들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내가 친구를 만나러 갈 때도 같이 가자며 떼쓰다가도, ‘네가 친구를 만난 것 처럼 엄마도 친구 만나고 올게’ 했더니 급 이해하고 볼에 뽀뽀도 해주며 인사했다.

긴 연휴 후 돌아온 월요일. 매일 아침 신나게 들어가던 어린이집에선 나에게 다시 살짝 안겨 엄마랑 있고싶다 찡찡하고, 한참 지지고 볶았던 남편에게서 오늘따라 보고싶다 연락오고, 나도 괜히 사진첩을 뒤적이는. 민들레는 민들레인 월요일.

독일에서 출산하기로 결정하고 독일에서 출산한 한국 사람들의 후기를 많이 찾아 읽었다. 그리고 대강의 흐름을 상상했었다. 하지만 그 많은 후기 중에 나와 같은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처음부터 달랐다. 정기검진 하러 온 산부인과에서 구급차를 타고 출산병원에 간 후기는 없었으니까.

독일출산에서 가장 걱정스러웠던 건 아무래도 언어였다. 산부인과에 검진을 가서도 항상 새로운 단어를 맞닥트렸고, 내 몸에 나타난 변화를 설명하려면 일단 구글부터 켜야 했다. 임신 중에 독일어 스트레스를 추가로 받고 싶지 않아서 독일어로 된 출산 관련 책은 볼 생각도 하지 않았고, 인터넷에서 임신과 출산 시 꼭 필요한 단어 리스트 정도만 알고 있었다. 단어를 아는 것과 사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데, 출산할 때는 이 차이가 너무나 극명했다. 목소리를 입 밖으로 내는 것조차 힘들었으니까. 남편이 내 입 가까이에 귀를 대고 몇 번을 시도해서 내 의사를 조산사에게 전달하는 원초적인 시스템만 있을 뿐.

출산 후기들과 또 달랐던 건, 가능할 때까지 내 배에 CTG 선들이 연결돼 있었던 거다. 태아의 심박수 이상이 감지돼서 병원에 간 만큼, 심박수를 주기적으로 체크할 필요가 있었다. 내 기억으론 그 선들을 아이가 나올 때까지 달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고 어떻게 이 자세 저 자세를 취했는지 모를 일이다. 어느 순간 선을 떼어냈는데 내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잊으라고 해도 잊지 못할 것 같은 건, 아직 나오지 않은 아이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피를 뽑아 체내 산소 포화 정도를 확인한 거다. 아직 배에 있는 아이의 머리에, 아이가 나올 길을 거슬러 들어가 메스로 상처를 내고 피를 채취했다. 다섯 번. 아이는 2년이 지난 지금도 머리카락 사이에 다섯 개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진행이 더뎌지면 안 됐기에 무통주사(PDA)도 맞지 못했다.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의사가 이번 혈액 채취를 마지막으로 분만을 좀 더 시도해 보고 안되면 수술을 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걸 들었다. 그때 나는 뭐 어떤 결정을 할 뇌의 용량도 남아있지 않았다. 변비니 수박이니 하는 건 말도 안 되게 고상한 표현이다. 네가 죽거나 내가 죽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 이 고통이 끝나겠구나 생각하는 참이었으니.


그렇게 아이는 세상에 나왔다. 아이를 품에 안기 전 잠깐 숨을 고르는동안, 아이의 목에 감겨있던 탯줄을 돌려 풀었다. 세 바퀴나. 그렇다. 목에 감긴 탯줄이 심박수를 떨어뜨렸던 거다. CTG를 진행하는 그 40분 동안 이상이 감지됐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옆에서 출산과정을 모두 지켜본 남편은 아이가 나오자 감격한 듯 눈이 울렁울렁했다. 나야 제정신이 아니었다 치고, 맨 정신으로 그 과정을 지켜본 남편에겐 출산이 가감 없이 느껴졌나 보다. 출산 이후, 나는 두 번째 아이는 남자가 임신할 수 있을 때 가질 거라고 이야기했다.


아이가 나오고 남편이 탯줄을 잘랐다. 그리고 나에게 내 태반을 볼거냐고 물어봤다. 그땐 순간 놀라고 약간 무서운 마음에 보지 않겠다고 했는데, 아이를 무럭무럭 자라게 해 준 내 몸의 일부에게 그동안 수고했다고 작별인사 정도는 해줄걸 그랬다.

아이를 가슴에 안은채로 분만실 옆에 붙어있는 방으로 옮겨졌다. 비교적 편안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그 방에서 아이는 공식적으로 이름을 가졌다. 독일에서는 보통 출생하고 바로 아이 이름을 지어준다. 아이 얼굴을 보고 그 자리에서 바로 지을 수는 없으니 임신기간에 이름을 고민하고, 임신 후기쯤엔 잠정적인 이름을 부모가 정해놓는다. 하지만 지인에게 출산 전에 이름을 알리지는 않는다고.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이름을 갖는다는 건, 병원에서부터 간호사와 의사들이 아이에게 이름을 불러준다는 거다. 별 일이 없으면 잘 때도 엄마 침대 옆에 이동식 아기 침대를 붙여놓는 식으로 항상 같이 있지만, 검사를 받으러 가거나 수유 연습을 하거나 할 때 벌써부터 한 명의 고유한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대접을 받는 것이다.

한 시간 정도 후, 품에 안긴 아기와 남편과 함께 병실로 간다. 이제부터 초보 엄마 아빠의 본격적인 사투가 시작된다. 

예정일 3일 전 목요일, 산부인과 정기검진이 있는 날이다. 예정일 한 달 전 부터는 2주에 한 번 산부인과에 가서 CTG를 보고, 초음파 또는 내진을 본다. 내 경우는 태아의 크기가 평균보다 작아서 그 즈음엔 출산 할 병원에도 정기검진을 보러 갔으니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검진을 한 셈이다.

그 날 오전도 여느 검진때처럼 부른 배를 내놓고 모로 누워 아기의 심박수와 수축정도 등을 재고있었다. 보통 40분 정도 체크한다. 연결이 좋지 않아 측정이 잘 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기에 중간중간 간호사가 들어와 잘 기록되고 있는지 살펴본다. 그런데 중간에 들어온 간호사가 치수를 보더니 약간 긴장한 모습으로 의사를 부른다. 곧 들어온 의사가 보더니 응급차를 불러 출산병원으로 지금 가야한단다. 일반적 태아 심박수가 130-150 사이인데, 수치가 80 이하로 떨어진게 보였던거다. 언제나 차분하고 고상한 목소리의 의사선생님도 좀 긴장한 듯 보였으나, 그보다는 아이가 곧 나올 것이라는 기대섞인 흥분감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환자용 들것에 들려 나가는 나에게 친절한 웃음과 함께 걱정이 아닌 응원을 해 줬다.

통증도 없고, 양수가 터지거나 어디 불편한 것도 아닌데 나는 들것에 잘 동여매져 구급차에 태워졌고, 곧 출산할 병원에 도착했다. 피를 두 번 뽑고 CTG를 한 시간 정도 봤다. 중간에 아이가 잠들었는지 신호가 활발하지 않아서 아이를 깨운다며 레몬 오일을 한 방울 적신 천을 주며 코 밑에 대고있게 했다. 그래도 산부인과에서 봤던 것 같은 특별한건 보이지 않았다. 초음파도 보고 병실을 받았다. 그리고는 바로 유도분만을 시작했다. 별건 없었다. 오후에 알약 하나를 먹고 CTG 한 시간, 저녁에 또 알약 하나를 먹고 CTG 한 시간. 하지만 그날 밤 내내 통증이고 뭐고 아무 일이 없었다. 

아이가 나오면 남편은 두 달 동안 육아휴직을 내기로 했다. 그 말인 즉, 당장 내일이라도 아이가 나오면 남편은 더이상 회사에 가지 않는다는 얘기다. 아침에 지갑만 들고 산부인과를 갔다가 그 길로 입원한 나를 따라, 남편도 회사일을 제치고 서둘러 와야했다. 유도분만 알약을 먹었지만 정말 아무런 변화를 느낄 수 없었던 나는 걸어서 5분거리인 집에 15분은 걸려 가서 전에 챙겨둔 출산가방을 들고 병원으로 왔고, 남편도 다시 회사에 가서 일을 마무리하고 왔다.

고요한 병원 첫날 밤이 지나고 다음날 아침. 세 번째 알약을 먹고 CTG 한 시간을 했다. 그래도 뭐 별 반응이 없자 병원 내 산책을 추천했고, 병실로 돌아오자마자 양수가 터졌다. 이제부턴 또 다른 단계다. 8시간에 한 번 씩 혈액검사를 하고, 4시간에 한 번 씩 항생제를 투여한다. B군연쇄상구균 때문이다. 이 역시 출산 한 달 전 보험회사에서 부담해서 진행하는 검사로, 양성반응이 나와서 양수가 터지고 난 후 부터는 항생제를 꾸준히 맞아야 한다. 양수는 터졌지만 통증은 거의 없다. 오후 세 시에 네 번째 알약을 먹고 저녁 아홉시에 다섯 번째 알약을 먹는다. 그러자 슬슬 진통다운 진통이 오기 시작한다.


독일의 분만시스템은 이렇다. 부인과 진료를 보러가는 부인과전문클리닉이 있고, 출산을 할 수 있는 출산센터나 대형병원이 있다. 임신기간동안 체크를 받으러 다니는 산부인과는 사실 부인과이고, 그 곳에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출산을 앞둔 부모들은 어디에서 출산을 할 지 적극적으로 알아보고 선택해야한다.

슈투트가르트에는 큰 병원 네 곳, 그리고 그 외 몇몇 출산센터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다. (아이를 받을 수 있는 조산사를 집으로 불러 집에서 낳을 수도 있다.) 이 병원들에서는 정기적으로 인포아벤트Infoabend를 연다. 예비부모들을 상대로 병원의 출산 시스템, 철학, 자료, 입원실과 분만실까지 보여주고 질의응답을 하는 날이다. 여러 곳을 돌아보며 정보를 얻고 본인의 가치관에 맞는 출산병원을 선택할 수 있다.

나의 경우 집에서 버스 한 정거장 떨어진 곳에 출산 가능한 병원이 있었다. 그래서 딱히 다른 옵션을 고려하지 않기도 했지만, 인포아벤트에 가서 보니 가히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일단 독일 평균보다 자연분만율이 높았고, 병원측에서도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듯 했다. 무엇보다 신기했던건 분만실이었다. 총 세 개의 분만실이 있는데, 각 분만실은 세 개의 연결된 방으로 구성돼있었다. 가운데 가장 큰 방이 분만을 하는 방인데, 가운데는 침대나 굴욕의자가 아닌 변신하는 의자가 있었다. 출산에 가장 좋은 자세를 취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조작할 수 있단다. 오디오도 있어서 좋아하는 노래를 가지고 오면 틀어주기도 한다고. 연결된 방들은 각각 출산에 도움을 주는 방들 이었다. 왼쪽으로 연결 된 방에는 짐볼과 매트 등이 있었고, 오른쪽 방에는 수중분만이 가능한 욕조가 있었다.

이 모든것이 보험으로 처리가 된다. 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매일 입원비 10유로를 개인이 부담해야하고, 2인실 혹은 3인실이며, 보호자는 병원에서 같이 밤을 보낼 수 없다. 보호자가 항상 같이 있을 수 있는 가족실의 경우 하루에 150유로를 개인 부담 해야한다. 신생아실은 없고, 아이는 출산 직후부터 엄마와 함께 있는것이 원칙이다.


진통이 오고 언제부턴가 나는 분만실에 누워있었다. 남편도 눈을 좀 붙이라고 입원실로 보내고, 출산준비수업에서 배운 호흡법을 좀 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를 반복했다. 자정을 넘어서자 내 의지로 호흡법을 유지하는게 힘들어졌다. 간호사를 불러 남편을 불러달라고 했다. 열리는 문 뒤로 잠을 미처 다 떨쳐버리지 못한 남편의 얼굴이 보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멘탈이 나가는게 보였다. 그리고는 간호사에게 묻는걸 들었다.

"애가 지금 나오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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