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동안 얼마나 좋은 데엠을 가졌던가! 꽤 넓은 면적에 물건들이 일정 규칙에 따라 잘 정리 돼 있었고 오픈플랜으로 한 눈에 꽤 많이 파악할 수 있었다. 아기용품에 대해 얘기하자면 할 말이 더 많다. 모든 브랜드의 모든 크기의 기저귀가 다양한 포장규격으로 구비 돼 있었다. 아기옷도 저렴이부터 유기농까지의 선택권이 있었다. 내복도 있어서 응아가 샌 긴급 상황에 바로 계산해 입힐 수 있었다. 아 맞다. 기저귀 가는 곳도 널찍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않고 언제든 기저귀를 갈 수 있었다.

지금은 두 곳의 데엠에 어렵지않게 갈 수 있다. 새로 이사한 집 근처에서 걸어서 10분에 하나, 회사에서 집에 오는 전철역 근처에 하나. 하지만 둘 다 예전 데엠보다 좋은 점은 찾아볼 수 없다. 좁고, 정수기도 없고, 기저귀 가는데(는 이제 어차피 별 필요는 없지만)도 불편하고, 무엇보다 우리가 사던 팸퍼스 베이비드라이 점보팩이 없다! 좀 더 비싼 팸퍼스 프리미엄은 점보팩만 들어와 있고, 베이비드라이는 일반팩만 있다. 사이즈에 따라 한 팩에 들어있는 개수가 다른데, 지금 쓰는 사이즈는 일반팩으로 사면 30개가 들었다. 30개. 누구 코에 붙이나. 딸래미 엉덩이에 붙이지.

어린이집에서 기저귀가 더 필요하다고 해서 이번엔 아마존에서 주문 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주문 후 이틀이 지나도 배송조차 안돼서 취소하고 회사 근처 데엠에 갔다. 기저귀코너 앞에서 내 귀한 ‘퇴근 후 10분’을 소비하고 결국은 엉덩이에 붙일 일반팩 하나를 집어들었다. 기저귀 공급에 차질이 생겨 기저귀를 떼야 할 판.

나는 요즘 특히나 행복해지기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나중에 내 딸에게, 행복한게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중요한 것 중 하나라고 얘기하는걸 상상한다. 그리고 그게 과연 옳은 행동일까도 생각한다. 진짜로 내가 행복한건 스스로를 위해 꼭 필요하지만, 남과 잘 지내기위해 행복하려고 노력하는건 피곤하고, 또 결국엔 슬퍼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노하우에 대해 말을 아끼시는 편이다. 엄마에게는 중학교 1학년 때 국사 시험에 잘 대비하는 공부법을 흥미롭게 배운 기억이 있다(물론 그 때 뿐이었지만). 아빠는 지나가는 말처럼 얘기한게 신기하게도 주로 기억에 남는데, 나는 머리만 쓰고 행동으로는 잘 옮기지 않는다거나 하는 말이다.
부모란 아무리 자식에게 말을 아껴도 잔소리하는 존재인건 어쩔 수 없나보다. 그래서 더욱 내 딸에게 무엇을 어떻게 얘기할지가 망설여진다. 네가 행복한게 제일 중요하다고 얘기해야할까, 행복하기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얘기할까.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작은것에 만족하면 행복하다는데 그건 정말 말도 안되게 어려운 경지라고 얘기를 해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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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욕망이 생기지 않았다. 가만 생각해보면 쉼과 내 시간에 대한 간절함만 있었던 것 같다. 퇴근 후 아이를 재우고 옆에 그대로 누워서 소설만 주구장창 보았다.

처음 시작한 책은 해리포터 죽음의 성물. 두 번 연달아 보았다. 마지막 끝판왕을 깨는 부분은 한 번 더 보았다. 그 이후로도 스티그라르손의 밀레니엄시리즈 세 권(이 역시 끝판왕 한 번 더), 기욤 뮈소의 브루클린의 소녀, 피터 스완슨의 죽여 마땅한 사람들, 나영석의 어차피 레이스는 길다(에서 여행기 부분은 빼고), 그리고 새 이북으로 이슬아의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종이책으로 독일 교육 두번 째 이야기를 읽었다.

그 와중에 웹툰도 많이 보았다. 루드비코의 들쥐, 운 김한석의 여의주, 정이리이리의 왕 그리고 황제를 새로, 배혜수의 쌍갑포차를 다시 시작했고 아주 재밌었다.

어쩌다보니 병실 침대에서도 읽었고, 남의집 쇼피에서도 읽었고, 양치질을 하면서도 읽었다. 그래도 이불 속에서 딸 아이의 머리카락 냄새를 가끔 맡으며 읽는게 가장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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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세 명의 건축가가 등장합니다.

첫째는, 에곤 아이어만 Egon Eiermann 입니다. 독일의 전후 모더니즘 건축가로 제가 살고있는 슈투트가르트의 IBM 본사 건물을 설계했어요. 더 유명한 건물로는 베를린에 카이저빌헬름교회가 있습니다. 오래된 성당 바로 옆에 유리블록으로 된 육각형 타워형 건물이 있는거요. 빛이 통과해 들어오면서 파랗게 된 유리블록 배경에 예수님 상이 있는 실내 사진, 그거요.
에곤 아이어만은 동시에 가구디자인으로도 유명합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일에서 처음으로 시리즈로 가구를 만들기 시작한 사람이에요. 가구 또한 그의 건축 못지않게 단순하고, 기하학적이면서도, 기능적이죠. (건축가 O.M. 웅거스의 선생님이었기도 합니다.)

둘째는, 제 남편입니다. 새로 임대한 사무실에 에곤 아이어만의 책상과 의자를 들여놓고 싶어하죠. 책상은 쉐어오피스의 주인이 가져다주기로 하고, 의자를 고릅니다. 공략하는 모델은 S 197 R 입니다. 엉덩이 쿠션도 없고, 팔걸이도 없습니다만 가격은 뭐가 좀 있네요.
다른 의자들은 썩 눈에 들어오지 않나봅니다. 결국 중고거래사이트에서 괜찮은걸 하나 찾아 의자를 보러가기로 합니다.

셋째는, 의자 주인 할아버지입니다. 의자를 찾아 간 집은 꽤 좋은 동네에 있었습니다. 집에 들어가자 여러 건축적인 디테일들이 보입니다. 좀 아는체를 하니 주인 할아버지가 자기가 직접 지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개인 서재 겸 작업실도 집 안에 있습니다.
의자는 자기 아들을 위해 샀던건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나라로 일하러 갔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 건축가의 응원과 함께 의자를 업어옵니다. 뭔가 지혜를 전달받는 느낌적인 느낌도 듭니다.

비어있던 공간에 책상과 의자가 들어오니, 자리가 벌써 그럴듯 해 보입니다. 혹은 그런 뿌듯한 마음이거나요.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밤 꼬박을 끙끙 앓았다. 몸이 으슬으슬 아파 열을 재보니 39도다. 어제 처방받은 약은 기침 가래, 코감기 약 뿐이라 몸살약이 없는데... 남편이 부랴부랴 어디선가 소염진통제를 찾아준다.

출근 후 한 달이 지나고 맞은 주말을, 나는 이렇게 앓으며 보냈다. 기특하게도 딸은 엄마가 아프다 하니 많이 찾거나 보채지 않는다. 덕분에 뜨문뜨문 낮잠으로 체력을 보충했다. 사실은 주중엔 멀쩡하고 주말이 되니 아프기 시작한건 아니다. 이번 주 시작인 월요일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가벼운 감기기운이 있어 종합감기약 이틀 정도 먹으면 낫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웬 걸, 콧물이 점점 심해지고 기침도 하기 시작하더니 간 것 같던 몸살이 다시 왔다. 일주일 내내 없는 체력 갉아먹으며 병원균과 싸우다가 주말이 되자, 땡땡땡. 감기 바이러스, 승!

금요일 아침에는 도저히 안되겠어서 일어나자마자 영양제를 입에 털어넣었는데, 그게 또 체했네. 물과 약을 다 토했다. 오늘은 나 진짜 회사 못간다, 남편에게 선언하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잤다. 한 시간쯤 잤을까. 일어나보니 남편과 아이는 둘이서 출근과 등원준비를 거의 마친 상태. 한 잠 자니까 그래도 움직일 수는 있겠어서 꾸역꾸역 출근을 했다.


독일 회사도 병가가 있다. 그리고 쓰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의사한테서 소견서를 받으면 의사가 써 준 만큼 쉴 수 있다. 소견서를 회사에 제출하면 의료보험회사가 아파서 출근하지 못 한 날들의 임금의 반을 지원한다. 하루 정도 쉬면 괜찮아질 것 같을 땐 소견서 없이 회사에 얘기하면 병가로 인정 해 준다. (물론 일 수 제한은 있다.)

그런데 왜 나는 미련하게 병가를 쓰지 않는가!


아프던 중, 수요일 저녁 여섯시에 미팅이 있었다. 회사에 들어가 처음 참여한 프로젝트의 건축주와 같이 하는 미팅이었다. 저녁 여섯시에 잡혔는지라 팀장이 물어봤다. 참석 할 수 있냐고. (참 쿨한 회사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고는, 대신 오후에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했다. 세 시간 정도. 그랬더니 어딜가냐, 왜 가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러라고 한다. (회사 하나는 잘 뒀다)

같이 프로젝트를 준비 한 동료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오후 세시에 갔다가 다섯시 쯤 오겠다고 했더니, 어차피 건축주들은 늦는다며 다섯시 반까지만 와도 괜찮단다. 세 시 전에 미팅 준비를 같이 끝내기로 했지만, 설계일이 어디 두부썰듯 깔끔하게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던가. 동료가 자기 맡은 일이 좀 더 걸리니 내가 준비할 수 있는것만 해 놓고 다녀오란다.

그리고 나는 아이 어린이집에 갔다. 전날 저녁 늦게까지 남편이랑 만든 등을 들고. 가을 등 축제를 하는 날 이기 때문이었다. 엄마랑 보내는 시간이 적어져서 그런가, 처음 어린이집 등원할 때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요 며칠 아침마다 어린이집 앞에서 안들어간다고 엉엉 울면서 영화를 찍는다. 그렇게 우는 채로 선생님에게 안겨 들어가는 모습으로 안녕해서, 저녁 밥 먹기 전에 얼굴을 보니 마음이 짠했다. 그런 엄마가 오늘은 어린이집에 오다니! 아이 반으로 들어가니 그 마음 가득한 얼굴을 하고는 나에게 달려와 안긴다.

같이 노래 부르고, 부모들이 싸온 음식을 먹고, 밖에 나가 등을 들고 한바퀴 돈다. 얼마 같이 놀지도 않았는데 엄마가 다시 일하러 간다고 한다. 남편은 울기 시작하는 아이의 정신을 트램폴린으로 돌리고, 나는 다시 회사로 가는 버스를 탄다.


이렇게 내가 필요한 시간은 시간대로 챙기고, 지난주에는 아이가 아파서 이미 하루 출근을 안했는데, 아파서 못가겠다고 또 얘기 할 염치가 없었다. 아픈데, 아프다고 얘기 할 수가 없어ㅠ

그런 몸 상태로 출근을 하니, 하루 종일 두통과 콧물과 기침과 싸우느라 업무에 집중을 할 수가 없다. 코 풀러 화장실 가랴, 마실 물 끓이러 갔다오랴. 그래도 주말이 지나니 체력의 한 65프로 정도는 회복이 된 것 같다. 이제 뇌에 보낼 에너지가 좀 생긴 느낌이다.

남편이 제일먼저 한 일은 작업 할 장소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회사에서 50%로 일을 하고있는지라 정식으로 개인 일을 시작할 수는 없지만, 작업실에서 찬찬히 준비를 하겠다는 계획입니다.

인터넷으로 공고을 보고, 한 일이주 자전거로 여기저기 다녀보더니 맘에 드는 곳이 있다며 저에게 사진을 보여줬습니다. 처음 저의 반응은 ‘으응... 그래, 좋네’ 였구요. 붉은색 테라코타 바닥과 하얀색 벽을 가진 오래된 건물 땅층에 자리한 사무실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새로 시작하는 쉐어오피스라 합니다.

주인과 얘기를 해 봤는데, 자기와 생각이 비슷하다고 좋아합니다. 모두가 똑같은 책상과 의자를 가진 쉐어오피스가 아니라 들어오는 사람의 취향이 모여 완성되는 작업실을 지향한다고 합니다. 그 취향 중 하나가 남편의 것이 되는거구요. 총 다섯개의 책상 중 하나를 임대하는건데, 훗 날 자기가 그 다섯개의 책상 모두를 쓰는 (큰) 사무실이 되는 꿈도 얘기합니다. 부엌 겸 식당방은 거실처럼 안락하게 꾸밀 계획이라고도 합니다.

남편은 달떠있습니다. 이렇게 맘에드는 장소가 흔히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매일 올 수 있는 개인 작업실이 있으면 독립 건축가가 되는 준비도 차근차근 할 수 있을 거라구요. 그 부분은 동의하지만,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마음이 좀 앞선건 아닌가 하는 염려도 듭니다. 하지만 첫 시작을 지지하는 마음으로 결재(!)를 내렸습니다.

남편은 이제 개인 작업실이 생겼습니다!

작업실은 아이의 어린이집과 제 회사 중간에 위치합니다. 주거지역이지만 교차로에 있어 왕래가 제법 있는 길가입니다. 건너편엔 다른 건축사무소와, 광고회사도 이미 자리하고 있구요. 매력적인건, 남편 책상 바로 옆에 방 높이만한 큰 창이 있다는겁니다. 책상에 앉으면 대각선으로 가을이 폴폴 느껴지는 나무들 뒤로 교회 지붕이 살짝 보여요.

아직 책상도 의자도 없는 사무실입니다만, 누가 만들어 놓은 곳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간다는게, 어찌보면 지극히 건축가스러운(!) 방법인 것 같기도 합니다.

취직한지 한 달도 안됐는데 개업이라니 무슨 소리냐 하시겠지만, 이 포스팅 시리즈의 주인공은 제가 아니고 남편입니다.

한국에서 CC로 같이 건축 공부를 했던 남편은 졸업 후 포트폴리오를 들고 스위스로 떠납니다. 그리고 독일에 일자리를 구하게 되지요. 학부생 때부터 학업에는 뜻이 없던 남편에게 대학원 진학은 계획에 없었습니다. 물론 일을 하면서 미래를 위해(타이틀을 위해) 공부를 더 해야 하나 고민하던 때도 있었지만, 꾸준히 일을 해 지금은 독일 설계사무소 경력 7년차 독일건축가로 일을 하고있습니다. 

학업에는 정말 뜻이 없었지만, 옛날부터 사무실 개소에는 뜻이 많으셨습니다. 그 뜻이 독일에 왔다고 해서 꺾이지 않았고, 학생 때 같이 작업실을 쓰던 선배, 동기들이 사무실을 차리고 자기 설계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자기도 가까운 미래에 사무실을 차려야겠다고 얘기하곤 했죠. 그리고 2018년 10월 드디어 그 미래가 현실이 되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 현실이 되는 과정을 글로 옮기려 합니다. 제 3자도, 그렇다고 당사자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요. 글은 발행되기 전 당사자의 검열을 거칠 계획이지만, 남편에게 가진 불만을 토로하는 장이 될까 우려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어떤 부분에서 우리 부부는 정 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거든요. 

이런 위험요소(?)들이 있지만,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저도 취직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있지만, 사무실 개소하는데서 일어나는 일들은 속도도 빠르고, 규모도 커보이거든요. 물론 위에 말한 것 처럼 애매한 위치에서 이 사건을 보기 때문일 수 있겠지요. 당사자는 지금 머리가 복잡하겠지만, 저는 반 발짝 떨어져서 보니까요.

이 시리즈의 끝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행복이 어떤 모습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요.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이제부터 이 무모하고 두근두근한 길을 함께 가시는겁니다. 응원 해 주세요!

통장에 월급이 채 꽂히기도 전, 엄마로써 회사에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타이밍은 생각보다 일찍 왔다. 밤 사이 아이가 열이 났던 것.


사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는 '엄마'라는 타이틀이 회사에 적응하는데 오히려 도움을 주었다. 대화를 매끄럽게 끌어가는 재주가 없는 나에게 아이는 적절한 주제였다. 내 소개를 좀 더 하다보면, 졸업은 작년에 했는데 왜 이제서야 일을 시작하느냐는 질문이 도출된다. 그럼 아이가 하나 있고, 딸이고, 나이는 한살 반이고, 같이 졸업논문을 쓴 후에 일년동안 아이와 시간을 보냈다고까지 물 흐르듯 대답하게 되는 것이다. 동료들 대부분은 티는 안 내지만 꽤 놀라는 눈치였다. 놀랄만도 하지. 이제 일을 시작하는데 애가 있는 케이스가 독일인들에게도 많지 않은데, 외국에서 공부하겠다고 왔다는 사람이 그 공부가 이제 막 끝났는데 애가 있다고 하니. (여기 사람들에 비해 동양인들은 어려 보인다는 것도 한 몫 한 것 같고. 내가 그래 보였다는게 아니라...) 아무튼 내가 엄마라는걸 알게되면 대화가 끊겼을 때 다시 시작하기는 엄마이기 전 내가 겪었던 것 보다는 쉬웠다. 아이 어린이집 얘기, 언어 얘기, 사춘기가 온 너희 애 얘기, 아이와 휴가 보내는 얘기, 날씨와 감기 얘기...


그리고 엄마라고 하면, 나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도 조금 달라지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신입으로 들어 온 느낌이랄까. 이제 막 일을 시작한, 어제까지만 해도 학생인 애가 아니라, 조금이나마 동지애를 공유하는 사람으로 대하는 것 같은. 뭐 어디까지나 느낌이 그랬다는거다, 느낌이.


애가 있는 학생이었던 시절이 지나고, 주부로써 1년을 보내고, 애가 있는 신입사원이 된 나는 회사에서 아주 날아갈 것 같았다. 이건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 육아는 진짜 넘사벽이다. 학업보다, 직장생활보다 비교 할 수 없을만큼 훨배 힘들다. (그리고 이 중에서 나는 아직까지 회사생활이 제일 쉽다.) 일년만에 써보는 프로그램과 전공 관련 머리가 이제 슬슬 적응이 되는가 싶을 무렵, 아이가 열이났다. 날이 급격히 추워지긴 했지만 어제 어린이집도 잘 다녀오고 잠도 잘 잤는데.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책을 읽어주는데 몸이 좀 뜨끈했다. 잠을 좀 덥게 자서 그런가 했는데 이미 열이 39도. 새벽에 깬 아이 뒤치닥거리 하느라 아직 자고있는 남편을 깨워 이 비보를 알렸다.


내가 일을 시작하면서 남편은 50%로 일을 한다. 9시에 출근해 점심시간 없이 1시에 퇴근하는 직장생활이다. 이렇게 하기로 선택하면서 아이가 아프면 남편이 회사에 얘기해 아이를 케어하기로 말을 맞추긴 했었다. 하지만 막상 이 계획이 현실로 닥치니 난감한 모양이다. 이번주 목요일은 독일 공휴일이라, 샌드위치데이인 금요일은 어린이집이 방학하는 날이다. 그래서 남편이 하루 휴가를 쓰기로 했었는데, 그 휴가를 어제(월요일)에 냈다는거다. (아니, 그 날 어린이집 방학이라고 얘기 한 지가 언젠데...) 오늘, 내일 아이 때문에 못간다고 회사에 얘기하면, 화요일부터 쭉 쉬고 다음주 월요일에 출근하게 되는건데, 하필 어제 금요일 휴가를 내 놓고 와서, 계획적으로 아이가 아프게 된 것 같은 뉘앙스라는거다. 그래서 내일 아이 열이 내리면 어린이집에 보내도 되는지 물어보겠단다. (하이고, 어린이집 1도 모르는 소리 하시네.) 어린이집 전화해서 그 말도 꺼내기 전에 내일도 오면 안된다는 소리 듣고 시름에 빠져있는 남편에게 얘기했다. 그럼 하루는 내가 회사에 못 간다고 할게.


나의 성취보다는 가족의 행복이 내 행복이라는 생각으로 처음 회사를 골랐었는데, 지금이 또 한번 가족의 평화를 선택할 순간이야, 라고 생각했다. 사실 반은 기분 맞춰주려고 한 얘기였는데 남편이 그걸 덥썩 물었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남편이 다니는 회사보다 규모가 크고, 그런 부분에서 좀 자유롭긴 하다만, 나 아직 첫 월급도 안 들어왔는데... 


회사에 출근해서 앞 자리 사수(?)에게 얘기했다. 아이가 열이 나서 내일 집에 있고 싶은데 팀장한테 얘기하면 되냐고, 일단 너한테 얘기하는거라고. 막상 말을 꺼내려니 좀 망설여지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더 말하기 어려울 것 같아 질러버렸다. 그랬더니 팀장한테 얘기하면 된다면서 아이가 많이 아프냐고, 자기 아들 놀이방 애들도 다 아프다고, 이 날씨에 안 아플 애들이 없다는 무심한 듯 따뜻한 대답이 돌아왔다. 팀장(이자 임원단)은 너가 아픈걸로 등록을 하게 되면 간단하긴 한데 나중에 너가 아팠을 때 사용하지 못 할 수도 있으니 어떻게 해야하는건지는 알아보라는 대답을 들었다. 쿨하게 당연히 내일 안나와도 된다고 했지만, 자기는 한번도 써 본 적이 없다고 말을 덧붙이며 보인 어색한 웃음이 자꾸 생각났다. 모르는 부분이라 민망해서 그랬던걸까.


우리 층에는 남편처럼 아이 때문에 5-60%로 일하는 엄마가 두 명 있다. 그리고 이번주는 Baden-Württemberg주의 모든 학교가 방학이라 그 둘 모두 휴가.  80%로 일하는 아빠가 있어 물어보았다. 자기 부인은 집에서 일 해서 스케줄 조정이 자유로운 편인데, 미팅이 있어나 하면 자기가 시간을 내야한다고. 애가 아플 때 자기는 이렇게 했었다고 친절하게 얘기 해 줬지만, 자기도 딱 한 번 써봤다고 얘기하며 어색한 표정을 보였다. 잘 모르는 부분이라 민망해서 그랬던걸까.


비서아줌마 한테도 얘기하고나니 내일 일 하러 오지 않는걸 모두에게 확인받은 느낌이었다. 그 중 누구도 결재권을 가진 사람은 없었지만. (소아과에서 진찰을 받을 때 아이가 아파 부모가 아이를 돌봐야하면 소견서를 써준다. 이것만 가지고 가면 원칙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그리고 퇴근하기 전, 사수와 팀장이 같이 하는 프로젝트에 어제부터 내가 같이 하기 시작했던거라 오늘 작업 한 걸 사수와 얘기하는데, 사수가 자꾸 물어본다. 그래서 너 내일 안오는거지?



또르깡 또르르또르똘똥똥. 불규칙한 워낭 소리를 내며 여나흔 마리의 흰 양들이 우리로 돌아간다. 어디서 흐르는지 알 수는 없지만 세찬 계곡 물 소리도 들린다. 하긴 내가 있는 여기와 저기 양이 있는 곳 사이는 지척인 듯 보여도 바로 갈 수 없다. 사이에 깊은 골짜기가 있기 때문이다.

양들 뒷편으로는 곧이어 깎아지른 절벽이 시작된다. 내가 해발 1030미터에 있고, 저 절벽 꼭대기는 3970미터니까, 거의 3키로 가까이 절벽을 올라야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1885년부터 이 절벽을 통해 정상에 도달하기를 시도하다 2010년까지 60명이 목숨을 잃었다. 나는 지금 아이거 북벽 Nordwand 건너편에 있다.

저 위엔 눈이 있는데 나는 방금 해를 가리기위해 차양을 내렸다. 맨발로 발코니에 나와있지만 기분좋게 시원하다. 가끔 들리는 여기 아래 길을 지나는 버스 소리에 쾌감을 느낀다. 비현실적인 자연 안에서 매우 열심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지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숙소는 그린델발트에서 차로 7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다. 그린델발트는 융프라우요흐로 가는 길목이고, 5년 전 우리는 융프라우요흐를 갔다왔다. 고로 무엇을 봐야한다는 부담감 하나 없이 여기 앉아 눈만 뜨고 있을 수 있는것이다. 산 중턱이라고해도 엄청 높을게 틀림없는 곳에 덩그러니, 하지만 유유히 앉아있는 저기 집 한 채를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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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일 유학중에 임신을 했고, 부른 채로 수업을 들었고, 학기 막바지에 출산을 했다. 출산 후엔 교수님 미팅하러 유모차를 끌고 학교에 갔고, 아이가 학교 복도를 기어다니는 옆에서 졸업논문 발표를 했다. 모든게 계획하지 않은 것이었으나, 사실은 계획 거였다. 나는 아이와 나의 나이차가 많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항상 있었고, 때가 괜찮은 라고 생각했다. 이후에 닥칠 일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없었을 .

식상하지만 사실이라 말하지 않고는 넘어갈 없는게, 많은 도움들이 있었기에 헤쳐나올 있었다. 가장 도움은 남편이었다. 물론 육아는 남편이 도와줘야 하는 아니라 같이해야 하는 거고, 내가 졸업할 있게 말이다.

여러 사정으로 인해 독일에서 친정엄마나 시어머니 도움 없이 출산을 , 남편은 달의 육아휴직Elternzeit 냈다. 한국보다야 복지가 좋은 독일이지만, 그래도 남자가 육아휴직을 길게 내는건 그리 보편적이지는 않다. 특히 건축 설계분야에서는, 그리고 소규모 아뜰리에에서는 더더욱.

남편의 육아휴직이 끝나고 학기가 시작했고, 나는 졸업설계를 다시 시작했다. 사실 임신했던 학기에 시작했으나 중간에 포기했었다.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호르몬에 대항해 이기지 못했고, 늦게까지 책상에 앉아있던 날이면 아이에게 미안함이 든다는 그럴듯한 핑계도 있었다. 다시 시작한 졸업설계의 목표는 만족할 결과가 아니라 졸업이었다. 학부 처럼 일을 새서 작업해놓고 발표 직전에 누구 들으라고 하는 투정이 아니라, 순도 100% 진심으로.

아이가 다행히 순했(과거형...)기에, 낮잠자는 때나 혼자 누워서 틈틈히, 그리고 남편이 퇴근한 저녁과 주말에 작업을 했다. 충분히 상상이 가능하겠지만, 학기 중반쯤 모든 것에 허덕이며 지내던 중에 남편이 달콤한 얘기를 했다. 졸업 까지 금요일을 쉬겠다는거였다. 독일은 한국보다 휴가가 많다. 때가 졸업발표가 남은 시점이었던가, 수로 따지면 충분히 가능했다. 어차피 여름 휴가를 내도 어디로 놀러 가지도 못하는데. 하지만 건축설계분야는 또한 다른 독일 회사들에 비해 짜다. 소규모 아뜰리에에서는 더더욱.

남편은 마감 직전 일주일 휴가도 내서 힘을 모아주고 장렬히 회사로 복귀하셨다. 그로부터 한국으로 휴가를 가기 까지는 아이의 이유식과 나의 끼니도 담당하셨다. 한국에 가서 나는 처음으로 34 자유부인이 되었다. 그것도 아예 다른 땅으로 떠날 있는 자유를 가진 부인이자 엄마. 자유를 남편은 참으로 쿨하게 동의 주었다.

어제 남편은 12 회사 워크샵을 다녀왔다. 남편이나 다른 가족 없이 아이와 둘이서만 보내는 밤은 처음이었다. 친구랑 어디 놀러가는 것도 아니고 회사 워크샵이라는데, 나는 쿨하게 보내주지 못했다. 당연하지. 이틀에 주말도 하루 있으니. , 남편은 짐도 안싸고 나와 아이가 먹을 파스타를 만들고 국을 끓였다. 남편이 집을 떠나기 전까지, 아이는 열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불확실함이 주는 두려움이 컸던거다. 그동안 육아의 힘듦이 1이었다면, 남편이 없으니 2 같았는데, 체감상 1.4 정도 였다. 아이는 미열이 있었지만 놀고 먹고 쌌다. 그리고 나는 나에대한 기대치를 줄였다. 밥은 있는거 먹이고, 힘들다 싶으면 애쓰지 않고 유투브 베이비시터님을 모셔왔다. 밖에서 시간을 보낼곳도 재미나 교육을 따지지 않고, 닿는대로, 아이 하는대로 내버려뒀다. 쓰고나서 보니 완전 남편 육아방식이다.

이제 육아의 두려움은 남편에게로 옮겨갔다. 남편 , 이제 육아의 책임이 자기에게 넘어온다고 막판에 버릇 나쁘게 들이지 말란다. 하루 그렇게 한건데, 잔소리를 한다. 역지사지다. 있음 본격 역할 바꾸기가 다가오는데, 나는 남편의 성취를 위해 나의 시간과 체력을 그렇게 떼어줄 수가 없을 같다. 퇴근 진심이 가득 담긴 위로 혹은 용기의 말을 충분히 전하는거, 그건 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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