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달이면 만 세 살이 되는 딸. 독일어와 한국어 둘 다 말한다. 그리고 두 언어의 전환이 놀랍다.
어제 저녁, 잠 들기 전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내가 ‘작다’라는 말을 잘 못 알아들었다. 잘 때엔 아직 쪽쪽이를 무는데, 물고 말하면 당연히 알아듣기 어렵다. ‘잡다? 접다?’하고 되 물으니, 쪽쪽이를 손으로 빼서 들고는 ‘클라인klein 이라고오!’ 한다.
한국어는 일취월장이라 가끔은 ‘언제 이런 표현을 배웠지?’ 할 정도. 요새 새로 사용하는 말은 ‘~하거나 ~하거나 둘 중 하나만 해’다. 며칠 전에 ‘밥을 먹든지 내려가 놀든지 둘 중 하나만 해’라고 한 말을 기억하고는, 엄마아빠가 자기랑 안 놀고 둘이서 얘기할 때 써먹는다. ‘구슬 하고 놀거나, 말 하거나 둘 중 하나만 해!’. 말 하겠다고 하는 대답은 당연히 안 통한다.
‘엄마아빠처럼 어른이 되면 뭐 하고싶어?’ 같은 심도있는(?) 질문에 대답도 한다. 처음 물어봤을 땐 ‘혼자서 양치하고싶어’였는데, 이젠 ‘맥주 마시고 싶’다고.
집에서는 98% 한국어를 사용한다. 2%는 독일어인데, 장난으로 독일어를 가끔 사용하곤 한다. 주로 아이가 먼저 독일어로 말을 걸고, 나는 장단을 맞춰주는 정도. 내 독일어로는 적극적으로 놀아주지 않아 재미가 없는지 오래 가진 않는다.

딸을 어린이집 데려다 주고, 여느때처럼 버스를 타고 회사로 가는 길. 고개를 푹 숙이고 핸드폰을 보고있는데, 어떻게 그게 눈에 들어왔는지 모를일이다.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그들을 발견 한 일! 오늘은 흰 티셔츠에, 핑크색 테니스 스커트, 핑크색 발레슈즈를 똑같이, 똑.같.이 차려입은 금발의 할줌니 두 명을 발견했다. 예전 남편이랑 점심을 먹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처음 봤었고, 오늘은 두 번째. 남편이랑 같이 봤을 때도 옷 부터 가방, 악세서리까지 두 분이 꼭 같은 옷에 같은 포니테일을 하고있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띄었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레 웃음 근육이 움직였다. 그리고 확신했다. 그들은 연인이다! 남의 눈은 모르겠고, 내가 원하는대로 사랑하는 사람과 동일한 모습을 하고싶은 반짝반짝 빛나는 순수한 마음.

이렇게 빛나는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빛을 내뿜고 다니는 이 나라, 이 도시에서 나는 무엇이 걱정되어 마음의 근심을 떨쳐내지 못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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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유튭 얘기만 꺼내면 존대말을 사용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의도적으로 티스토리 로그인을 하지 않았다. 글을 쓰지 않는게 왠지 죄책감이 들었고, 다른사람이 쓴 글을 본다는게 나의 못난 점을 깨달아 느끼게 하는 것 만 같았다.

그러던 와중에 유튜브를 하고싶었다. 그나마 간간이 쓰던 글을 중단하니, 어딘가에는 내 목소리를 내야 했던거 아닐까. 눈으로 한 자 한 자가 보이는 글 보다, 휙 지나가고 마는 말이 더 편하게 느껴진 건 아닐까. 요새 대세는 유튜븐데 나도 거기에 발을 담그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고. 너도나도 개인 채널을 여니, 내 얼굴 하나 보이는 것 쯤이야 군중속에 몸을 숨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하고싶어서 했다.

그리고 두 개의 동영상을 올리고, 이런저런 드는 생각은 역시 글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백만년만에 로그인을 했다.

회사에서 단순작업을 하면서 유튜브를 듣기 시작했다. 처음엔 노래로 시작했던것이 점점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채널로 옮겨갔다. 듣다보면 소리만 들리는 이야기도 있고, 문득 반짝하는 이야기도 있고. 오프라인에서 귀를 열어도 한 쪽 귀로 들어와 반대쪽 귀로 흘러 나가는 언어가 들리니, 어쨌든 모국어로 말하는 이어폰 속 사람의 목소리가 내 속에 들어왔다. 옛날 엄마가 라디오를 틀어놓고 일 하던 그 마음이 이랬을까. 그래서 나도 누군가에게 마음에 들어가는 목소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안정감 혹은 따뜻한 그 무언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완벽주의자라기 보다는, 굳이 말하자면 마감주의자인 나로써는 영상을 촬영하고 편집하는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 영상에서 말할 구조만 어느정도 짜두는게 제일 중요한 포인트. 아, 그리고 퇴근 후, 세수하고 다시 화장하는게 좀 번거롭다. 아이를 재우고 난 후에야 영상을 촬영할 수 있으니까.

한 번 업로드 한 영상은 다시 보지 않는다. 한 번 발행 한 글은 다시 보지 않는것과 마찬가지로. 편집하는 중에나 나를 자세히 들여다 보게 되는데, 요 근래에 이렇게나 나에게 집중한 시간이 있었나 싶다. 몰랐던 습관들도 알게되고, 긍정적인 피드백도 하게 된다. 나를 돌아보고 돌보는데 좋은 자극이 된다.

유튜브를 통해 완전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게 내가 유튜브를 하고싶었던 이유이지 않을까 싶을 만큼. 나름 오랜 시간 외국에서 살면서 남편과, 아이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는 호사를 누렸지만, 그와 동시에 새로운 인연에 대한 갈증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좁은 사회, 문 밖으로 한 발짝만 내 딛으면 맞닥트리는 모국이 아닌데에 대한 긴장감까지. 너무 오랫동안 움츠리고 있어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 얼굴을 모르는 사람에게 보인다는데에 망설임이 있었지만, 한 번 해보니 별거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너도 나도 얼굴을 보이며 댓글로 얘기하는게 익명성의 대안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글이 아닌 제가 궁금하신 당신, 유튭에서 엄마건축가를 검색하면 아마 나올겁니다. 이렇게 존대말로 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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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을 써서 뭘 얻고 싶을까. 책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유시민 이사장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쓸모있는 사람이 되기위해 글을 쓴다고 한다. 이사장이기 전에 글 쓰는 사람이기도 한 유시민은 참혹한 과거 한가운데서 살아내던 그의 삶 속에서 ‘혹독한 글쓰기 훈련’을 받았다고 했다. 합수부 취조실에서, 도망다니던 반지하에서, 감금돼있던 독방에서, 맞지 않기위해, 돈을 벌기위해, 그 돈을 쓰기위해 글을 썼다. 그때만해도 작가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그 만큼 처절하게 글을 쓸 수는 당연히 없다. 그러나 조금 내 처지를 동정 해 보자면, 워킹맘에 독일어도 꾸준히 해야하는 상황에서 글을 쓰는걸 놓지 않으려 노력한다. 아니 오히려 이런 상황이 닥치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의 나는 책 읽기를 좋아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역사=외우는 것' 이라는 공식이 새기면서부터 소위 '역포자'가 되었다. 읽는것은 좋아했지만 역사적인 내용이 들어가면 읽히지 않았다. 자연스레 독서 편식이 생겼다. 재미 위주의 소설책을 주로 찾았다. 줄곧 내가 원하던 책을 구입해주던 엄마는 어느순간부터 독서를 지지하지 않았다. 엄마의 화장대에 새 책을 숨겨놓고 상으로 한 권씩 꺼내주었다.

고등학교 때나 대학 신입생 시절, 순수한 마음으로 진로를 고민할 때 내가 할 수 있는건 검색과 읽기였다. 내가 주로 의지했던건 내 선에서 검색하거나 찾아 읽어서 얻는 정보였는데, 꼬꼬마의 상황에서는 건축가가 도무지 어떻게 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 당시 방송피디 되는법에 대한 책을 읽은 기억이 있다. 피디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는 방법이 간략히 설명 돼 있고, 현직 피디들이 몇 마디 적은 책이었다. 당시 갓 입사한 신입사원 신분의 나영석피디의 글도 있었는데, 매우 쓰기 싫은데 선배가 시켜 억지로 적은 것 같은 느낌이었던게 기억난다.

그때부터 든 생각이었다. 건축가가 되는 법에 대한 글을 쓰자. 당시 내 나이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건축가가 말하는 건축가가 되는 법'을 내 깜냥이 되는 선에서 쓰고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거기에 더해 요즘은 '독일 건축가가 되는 법'도 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상상한다.

지금 내가 쓰는 글들은 건축가가 되는 법에 대해서도, 독일 건축가가 되는 법에 관한것도 아니다. 스파르타식 글쓰기 훈련은 더더욱 아니지만, 차분히 앉아 글을 쓰기 쉽지 않은 환경에서 나름 글쓰기 근육을 키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돈을 벌기위해 글을 써야하는것도 아니지만, 글을 쓰면 생각이 정리가 된다. 둥둥 떠다니다 뜬금없는 시간과 장소에서 나에게 들러붙는 먼지같은 생각의 조각을 싹싹 그러모아 카테고리를 분류하는 작업이다. Keep it simple. 살기위해 하는거다. '내'가 원하는 삶을.

열흘 휴가가 지나갔다. 독일의 바덴뷔템베르크 주는 부활절 앞, 뒤의 금요일과 월요일이 공휴일이다. 부활절을 중심으로 두 주는 학교들이 쉬는 방학이다. 딸의 어린이집은 부활절 이후 한 주동안 방학이어서 회사에 일주일 휴가를 냈다. 이 휴가는 초기, 중기, 말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는 지인 집으로 떠났던 3일. 휴양지 근처 가장 큰 도시이지만 정작 휴양지는 차타고 오가며 봤던게 다 였던. 지인집에서 죽치고 있었던 기간이었지만, 그래서 더 잘 쉬다 왔다.

긴 휴가 전 마지막 퇴근은 자리 정리도 제대로 못하고 파일 마무리도 제대로 못하고 하고, 뛰다시피 해서 원래 남편이 맡던 딸 픽업을 갔던 정도로. 시간을 쪼개서 쓰고 에너지와 집중도를 여기저기에 분배했어야 했던 시간 끝에 휴가를 얻었다. 남편의 여러 부분이 못마땅 해 보이고, 남편도 나에게 나름의 서운함이 쌓였던 상황에서, 우리를 나름 오래 봐 온 사람들과의 애정어린 수다가 건조한 마음에 잔잔히 비를 내려줬다.

휴가의 중기는 미뤄뒀던 집안일을 처리하던 기간. 볕 좋은 날 이불빨래도 하고, 꽃집에서 흙을 사서 분갈이도 해 주었다. 이사 후 새 집에 몬스테라와 산세베리아를 들였었는데, 무섭게 뻗어나가는 몬스테라와는 다르게 산세베리아는 자라지도 않고 새순도 올라오지 않아 새 흙을 넣어줘야겠다 생각했었다. 선인장용 흙을 사서 갈아주고, 그 김에 알로에베라도 큰 화분에 옮겨주고, 수경재배중이던 몬스테라도 화분에 옮겨심었다. 남편 사무실에 놓을 스투키, 보스턴고사리, 알로카시아, 하율이가 고른 타라 , 스킨답서스, 디펜바키아도 들여왔다.

여름에 친정부모님이 오시기로 했는데, 열흘 여행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렌터카를 예약했다. 숙소까지 예약하는게 목표였는데 실패. 원래 일주일 생각했던 일정이 열흘로 늘어나는바람에 기존에 두 도시에서 묵으려고 했던 계획도 세 도시로 바꼈고, 어디에 얼마나 묵는게 좋은지도 새로 계획해야 했기에 바로 예약할 수 없었다.

후기는 소셜활동기간이자 진짜 쉬는시간. 딸을 재우면서 같이 잠이 들지 않았던 밤에 한국영화 네 편을 보고, 한참 거리를 뒀던 예능도 하나 보았다.

친구들도 만나 수다 가득한 걸스나잇 한 번과 걸스오후 한 번을 가졌다. 평소 친구들을 만나려면 퇴근 후, 혹은 주말에 아이와 함께여야한다. 풀타임 워킹맘은 퇴근 후 아이가 자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하기에 주중은 패스. 아이와 함께 만나면 갈 수 있는 곳도 한정되고, 대화 집중도도 한참 떨어진다. 이러니 아이와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는 휴가기간에 친구를 만나면 죄책감도 덜 들고 온전히 내 시간을 보냈다는 만족감도 드니 일석이조. 한참 신나는 락을 들으며 기네스 생맥에 햄버거를 먹고, 자이언티 노래가 나오는 카페에서 플랫화이트와 치즈케익을 먹었다.

아이의 어린이집 친구도 약속을 잡고 만났다. 아이는 동네 어린이집에 다니는게 아니라 ‘어린이집 친구 = 동네 친구’가 아니다. 아직 친구들과 같이 놀 연령은 아니지만 공동육아는 언제나 독박육아보다 쉬우니까, 아이를 데려다주고 가끔 같은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다른 아이 엄마와 이번 연휴에 한 번 보기로하고 번호를 교환했었다. 독일 사람들도 ‘다음에 봐’하고는 소식 없는 경우가 많아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연락이 왔고, 동물들과 놀이터가 있는 공원에서 만났다.

평소에는 딸이 전혀 언급하지 않던 친구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웬걸. 만난다고 얘기한 후 부터 그 친구 이름으로 노래를 부르고, 친구가 탄다며 안타는 유모차까지 선뜻 올라탐. 만나서도 친구가 하는건 똑같이 따라하고, 혼자 놀다가도 친구 어디갔냐며 찾고. 너무 잘 놀아줘서 고마운 마음과, 이런 시간을 자주 만들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내가 친구를 만나러 갈 때도 같이 가자며 떼쓰다가도, ‘네가 친구를 만난 것 처럼 엄마도 친구 만나고 올게’ 했더니 급 이해하고 볼에 뽀뽀도 해주며 인사했다.

긴 연휴 후 돌아온 월요일. 매일 아침 신나게 들어가던 어린이집에선 나에게 다시 살짝 안겨 엄마랑 있고싶다 찡찡하고, 한참 지지고 볶았던 남편에게서 오늘따라 보고싶다 연락오고, 나도 괜히 사진첩을 뒤적이는. 민들레는 민들레인 월요일.

독일에서 출산하기로 결정하고 독일에서 출산한 한국 사람들의 후기를 많이 찾아 읽었다. 그리고 대강의 흐름을 상상했었다. 하지만 그 많은 후기 중에 나와 같은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처음부터 달랐다. 정기검진 하러 온 산부인과에서 구급차를 타고 출산병원에 간 후기는 없었으니까.

독일출산에서 가장 걱정스러웠던 건 아무래도 언어였다. 산부인과에 검진을 가서도 항상 새로운 단어를 맞닥트렸고, 내 몸에 나타난 변화를 설명하려면 일단 구글부터 켜야 했다. 임신 중에 독일어 스트레스를 추가로 받고 싶지 않아서 독일어로 된 출산 관련 책은 볼 생각도 하지 않았고, 인터넷에서 임신과 출산 시 꼭 필요한 단어 리스트 정도만 알고 있었다. 단어를 아는 것과 사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데, 출산할 때는 이 차이가 너무나 극명했다. 목소리를 입 밖으로 내는 것조차 힘들었으니까. 남편이 내 입 가까이에 귀를 대고 몇 번을 시도해서 내 의사를 조산사에게 전달하는 원초적인 시스템만 있을 뿐.

출산 후기들과 또 달랐던 건, 가능할 때까지 내 배에 CTG 선들이 연결돼 있었던 거다. 태아의 심박수 이상이 감지돼서 병원에 간 만큼, 심박수를 주기적으로 체크할 필요가 있었다. 내 기억으론 그 선들을 아이가 나올 때까지 달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고 어떻게 이 자세 저 자세를 취했는지 모를 일이다. 어느 순간 선을 떼어냈는데 내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잊으라고 해도 잊지 못할 것 같은 건, 아직 나오지 않은 아이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피를 뽑아 체내 산소 포화 정도를 확인한 거다. 아직 배에 있는 아이의 머리에, 아이가 나올 길을 거슬러 들어가 메스로 상처를 내고 피를 채취했다. 다섯 번. 아이는 2년이 지난 지금도 머리카락 사이에 다섯 개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진행이 더뎌지면 안 됐기에 무통주사(PDA)도 맞지 못했다.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의사가 이번 혈액 채취를 마지막으로 분만을 좀 더 시도해 보고 안되면 수술을 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걸 들었다. 그때 나는 뭐 어떤 결정을 할 뇌의 용량도 남아있지 않았다. 변비니 수박이니 하는 건 말도 안 되게 고상한 표현이다. 네가 죽거나 내가 죽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 이 고통이 끝나겠구나 생각하는 참이었으니.


그렇게 아이는 세상에 나왔다. 아이를 품에 안기 전 잠깐 숨을 고르는동안, 아이의 목에 감겨있던 탯줄을 돌려 풀었다. 세 바퀴나. 그렇다. 목에 감긴 탯줄이 심박수를 떨어뜨렸던 거다. CTG를 진행하는 그 40분 동안 이상이 감지됐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옆에서 출산과정을 모두 지켜본 남편은 아이가 나오자 감격한 듯 눈이 울렁울렁했다. 나야 제정신이 아니었다 치고, 맨 정신으로 그 과정을 지켜본 남편에겐 출산이 가감 없이 느껴졌나 보다. 출산 이후, 나는 두 번째 아이는 남자가 임신할 수 있을 때 가질 거라고 이야기했다.


아이가 나오고 남편이 탯줄을 잘랐다. 그리고 나에게 내 태반을 볼거냐고 물어봤다. 그땐 순간 놀라고 약간 무서운 마음에 보지 않겠다고 했는데, 아이를 무럭무럭 자라게 해 준 내 몸의 일부에게 그동안 수고했다고 작별인사 정도는 해줄걸 그랬다.

아이를 가슴에 안은채로 분만실 옆에 붙어있는 방으로 옮겨졌다. 비교적 편안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그 방에서 아이는 공식적으로 이름을 가졌다. 독일에서는 보통 출생하고 바로 아이 이름을 지어준다. 아이 얼굴을 보고 그 자리에서 바로 지을 수는 없으니 임신기간에 이름을 고민하고, 임신 후기쯤엔 잠정적인 이름을 부모가 정해놓는다. 하지만 지인에게 출산 전에 이름을 알리지는 않는다고.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이름을 갖는다는 건, 병원에서부터 간호사와 의사들이 아이에게 이름을 불러준다는 거다. 별 일이 없으면 잘 때도 엄마 침대 옆에 이동식 아기 침대를 붙여놓는 식으로 항상 같이 있지만, 검사를 받으러 가거나 수유 연습을 하거나 할 때 벌써부터 한 명의 고유한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대접을 받는 것이다.

한 시간 정도 후, 품에 안긴 아기와 남편과 함께 병실로 간다. 이제부터 초보 엄마 아빠의 본격적인 사투가 시작된다. 

예정일 3일 전 목요일, 산부인과 정기검진이 있는 날이다. 예정일 한 달 전 부터는 2주에 한 번 산부인과에 가서 CTG를 보고, 초음파 또는 내진을 본다. 내 경우는 태아의 크기가 평균보다 작아서 그 즈음엔 출산 할 병원에도 정기검진을 보러 갔으니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검진을 한 셈이다.

그 날 오전도 여느 검진때처럼 부른 배를 내놓고 모로 누워 아기의 심박수와 수축정도 등을 재고있었다. 보통 40분 정도 체크한다. 연결이 좋지 않아 측정이 잘 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기에 중간중간 간호사가 들어와 잘 기록되고 있는지 살펴본다. 그런데 중간에 들어온 간호사가 치수를 보더니 약간 긴장한 모습으로 의사를 부른다. 곧 들어온 의사가 보더니 응급차를 불러 출산병원으로 지금 가야한단다. 일반적 태아 심박수가 130-150 사이인데, 수치가 80 이하로 떨어진게 보였던거다. 언제나 차분하고 고상한 목소리의 의사선생님도 좀 긴장한 듯 보였으나, 그보다는 아이가 곧 나올 것이라는 기대섞인 흥분감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환자용 들것에 들려 나가는 나에게 친절한 웃음과 함께 걱정이 아닌 응원을 해 줬다.

통증도 없고, 양수가 터지거나 어디 불편한 것도 아닌데 나는 들것에 잘 동여매져 구급차에 태워졌고, 곧 출산할 병원에 도착했다. 피를 두 번 뽑고 CTG를 한 시간 정도 봤다. 중간에 아이가 잠들었는지 신호가 활발하지 않아서 아이를 깨운다며 레몬 오일을 한 방울 적신 천을 주며 코 밑에 대고있게 했다. 그래도 산부인과에서 봤던 것 같은 특별한건 보이지 않았다. 초음파도 보고 병실을 받았다. 그리고는 바로 유도분만을 시작했다. 별건 없었다. 오후에 알약 하나를 먹고 CTG 한 시간, 저녁에 또 알약 하나를 먹고 CTG 한 시간. 하지만 그날 밤 내내 통증이고 뭐고 아무 일이 없었다. 

아이가 나오면 남편은 두 달 동안 육아휴직을 내기로 했다. 그 말인 즉, 당장 내일이라도 아이가 나오면 남편은 더이상 회사에 가지 않는다는 얘기다. 아침에 지갑만 들고 산부인과를 갔다가 그 길로 입원한 나를 따라, 남편도 회사일을 제치고 서둘러 와야했다. 유도분만 알약을 먹었지만 정말 아무런 변화를 느낄 수 없었던 나는 걸어서 5분거리인 집에 15분은 걸려 가서 전에 챙겨둔 출산가방을 들고 병원으로 왔고, 남편도 다시 회사에 가서 일을 마무리하고 왔다.

고요한 병원 첫날 밤이 지나고 다음날 아침. 세 번째 알약을 먹고 CTG 한 시간을 했다. 그래도 뭐 별 반응이 없자 병원 내 산책을 추천했고, 병실로 돌아오자마자 양수가 터졌다. 이제부턴 또 다른 단계다. 8시간에 한 번 씩 혈액검사를 하고, 4시간에 한 번 씩 항생제를 투여한다. B군연쇄상구균 때문이다. 이 역시 출산 한 달 전 보험회사에서 부담해서 진행하는 검사로, 양성반응이 나와서 양수가 터지고 난 후 부터는 항생제를 꾸준히 맞아야 한다. 양수는 터졌지만 통증은 거의 없다. 오후 세 시에 네 번째 알약을 먹고 저녁 아홉시에 다섯 번째 알약을 먹는다. 그러자 슬슬 진통다운 진통이 오기 시작한다.


독일의 분만시스템은 이렇다. 부인과 진료를 보러가는 부인과전문클리닉이 있고, 출산을 할 수 있는 출산센터나 대형병원이 있다. 임신기간동안 체크를 받으러 다니는 산부인과는 사실 부인과이고, 그 곳에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출산을 앞둔 부모들은 어디에서 출산을 할 지 적극적으로 알아보고 선택해야한다.

슈투트가르트에는 큰 병원 네 곳, 그리고 그 외 몇몇 출산센터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다. (아이를 받을 수 있는 조산사를 집으로 불러 집에서 낳을 수도 있다.) 이 병원들에서는 정기적으로 인포아벤트Infoabend를 연다. 예비부모들을 상대로 병원의 출산 시스템, 철학, 자료, 입원실과 분만실까지 보여주고 질의응답을 하는 날이다. 여러 곳을 돌아보며 정보를 얻고 본인의 가치관에 맞는 출산병원을 선택할 수 있다.

나의 경우 집에서 버스 한 정거장 떨어진 곳에 출산 가능한 병원이 있었다. 그래서 딱히 다른 옵션을 고려하지 않기도 했지만, 인포아벤트에 가서 보니 가히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일단 독일 평균보다 자연분만율이 높았고, 병원측에서도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듯 했다. 무엇보다 신기했던건 분만실이었다. 총 세 개의 분만실이 있는데, 각 분만실은 세 개의 연결된 방으로 구성돼있었다. 가운데 가장 큰 방이 분만을 하는 방인데, 가운데는 침대나 굴욕의자가 아닌 변신하는 의자가 있었다. 출산에 가장 좋은 자세를 취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조작할 수 있단다. 오디오도 있어서 좋아하는 노래를 가지고 오면 틀어주기도 한다고. 연결된 방들은 각각 출산에 도움을 주는 방들 이었다. 왼쪽으로 연결 된 방에는 짐볼과 매트 등이 있었고, 오른쪽 방에는 수중분만이 가능한 욕조가 있었다.

이 모든것이 보험으로 처리가 된다. 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매일 입원비 10유로를 개인이 부담해야하고, 2인실 혹은 3인실이며, 보호자는 병원에서 같이 밤을 보낼 수 없다. 보호자가 항상 같이 있을 수 있는 가족실의 경우 하루에 150유로를 개인 부담 해야한다. 신생아실은 없고, 아이는 출산 직후부터 엄마와 함께 있는것이 원칙이다.


진통이 오고 언제부턴가 나는 분만실에 누워있었다. 남편도 눈을 좀 붙이라고 입원실로 보내고, 출산준비수업에서 배운 호흡법을 좀 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를 반복했다. 자정을 넘어서자 내 의지로 호흡법을 유지하는게 힘들어졌다. 간호사를 불러 남편을 불러달라고 했다. 열리는 문 뒤로 잠을 미처 다 떨쳐버리지 못한 남편의 얼굴이 보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멘탈이 나가는게 보였다. 그리고는 간호사에게 묻는걸 들었다.

"애가 지금 나오는거야?"

새벽 네시에 아이가 깼다. 영아시절 보통 기상시간이긴 했다만... 오늘은 엉엉 울면서 추피를 찾는다. 아이가 울어도 꿈쩍않는 남편을 깨워 거실에서 추피 책을 가져오게했다. 다섯 권을 읽는 동안 잠이 다 달아나버린 아이와 함께, 네시 반 부터 하루를 시작한다.

요 며칠은 아침 스트레칭으로 시작했지만 오늘은 불가능하니 패스. 다음 스케줄은 식기세척기 정리다. 부엌에 가니, 어제 새 집 손님맞이 흔적이 아직도 그대로다. 아이는 조리대에 앉아 남은 과자를 먹고, 나는 그 아래서 깨끗해진 접시들을 옮긴다.

집들이라고 부를 것도 없이 어제는 아주 간소했다. 남편은 저녁 떡국을, 나는 간식 머핀을 맡았다. 오전에 아이와 구운 바나나 초코 머핀에 차와 커피를 마시고 거기에 뜨거운 물 몇 번, 그리고 버터링 쿠키를 추가했다.

지난 달 아이 생일에 어린이집에 보낼 레인보우 머핀을 만들 때 머핀믹스 몇 박스를 사왔었다. 시판 믹스를 기본으로 색소를 추가해 만들었었다. 마트에 있는 바닐라 머핀 믹스는 초코칩이 든 것 밖에 없었어서 집에 초코칩만 몇 봉지 남아있었다. 그 후로 주말에 시간이 나면 아이와 초코 바나나머핀을 만들었다. 아이가 매일 한 입 만 먹고 남기는 냉장고에 보관중인 바나나들과 함께.

집에서 만든 머핀은 부푼게 유지되지 않고 폭신폭신하지 않은게 항상 문제다. 쫀득쫀득 한 식감도 뭐 나쁘진 않지만, 납작한 머핀은 예쁘지가 않잖아. 버터, 계란, 우유를 실온에도 놔둬보고, 가루류를 열심히 체 쳐 보기도 하고, 최대한 덜 저어보기도 했지만 딱히 차이점이 없었다. 베이킹파우더가 과하면 쓴 맛이 난다기에 그건 마지막 보루로 두었다가 어제 시도 해 보았다. 최소 세 개의 바나나가 필욘한데, 두 개 뿐이길래 설탕을 좀 더 넣었었다. 그게 쓴맛을 좀 덮어주길 바라며.

오븐에서 막 나온 머핀은 비주얼이 비슷하다. 노릇노릇 구워진 윗 면에 예쁘게 갈라진 노오란 틈이 보이는. 어제는 왠일로 식었는데도 많이 가라앉지 않았다. 손님이 오기 전에 아이와 남편과 앉아 두 개를 나눠 먹었는데, 속이 폭신폭신한게 아닌가! 나의 머핀 역사에 처음 있는 일. 속이 부드러우니
머핀 뚜껑이 바삭한게 더 두드러진다. “어떻게 한거야?” 남편이 물어본다. “나도 모르지... 다음번에도 바나나 두 개와 베이킹파우더 많이 레시피로 해 보긴 할게...”

머핀이 성공 한 덕분에 손님맞이 부담이 좀 줄었다. 그래도 집들이 선물, 아이에게 물려줄 옷을 바리바리 챙겨 오는 지인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기엔 너무나 부족했다. 고모, 이모, 삼촌, 오빠가 놀러오니 기분이 좋아진 아이는 손님이 가고 나서도 그 흥이 가라앉지 않아 어제 밤 늦게서야 잠이 들었고, 흐트러진 리듬 탓인지 그래서 이 새벽에 한 번 깬 것 같다.

과자를 먹고 아침을 먹겠다는 아이에게 시리얼을 우유에 말아줬는데, 몇 숟가락 먹더니 자러간단다. 쪽쪽이를 찾아 자는 아빠 옆으로 슬슬 간다. 다섯시 반. 혼자 자는가 싶더니 낑낑한다. 무릎에 눞혀 재운다. 깊게 잠든 것 같아 침대에 내려놓는다. 여섯시. 이렇게 한 주도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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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셋의 워킹맘이던 엄마는, 나의 공부를 당신이
그렇게 열심히 챙기셨다. 중학교 1학년때는 국사 시험공부를 같이 했고, 어느때까지는 수학도 직접 가르쳐 주셨다. 직접 가르쳐 주기가 버거워 질 학년 쯤에는 문제집 양을 정하고 체크하셨다.

시골 할머니 집에서 방학을 보내면서도 식탁에 앉아 수학 문제집을 풀고 있던 때, 아마 너무 양이 많아서 그랬던 듯 할머니 앞에서 엉엉 울어버렸다. 할머니도 선생님, 할아버지도 선생님, 엄마도 선생님이었던 탓(?)에 아무도 문제집을 푸는걸 뭐라 하지 않았던 환경이었지만, 그 때 만큼은 할머니가 엄마한테 한 소리 했던 것 같다. 나도 시간이 지나면 시어머니에게 아이의 교육에 대해 한 소리 들을 때가 올까.

엄마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그런 감정들은 나에게 이제는 다행히 지나간 감정이다. 요새는 아이 셋을 키우면서, 일도 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일일이 챙길 수 있었을까하는 놀라운 마음이 든다. 물론 당연히 그 때, 그리고 지금도 한국 엄마의 필수 덕목이었겠지만,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엄마랑 같이 맛집을 다녔을까, 같이 요리를 했을까, 같이 티비를 보며 깔깔댈 수 있었을까. 엄마와 나와의 갈등이 생기지 않았을까, 우리는 좀 더 친밀한 감정을 나눌 수 있었을까. 그 어느 가정도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내가 엄마의 입장이 되니 이런 생각도 다 든다. 그렇게 혹여나 생겼을 마음의 여유와 시간을 아빠와 함께 보낼 수 있었을까 하는.

아이가 하나임에도 나는 회사 일에, (76프로 정도는 남편이 하는)집안 일에, 육아에. 아이보다도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할 남편과, 지금 같이 할 시간과 에너지는 정작 부재한다. 누가 이 짐 좀 덜어주면 숨통이 트일 것 같다는 생각. 그러면 단정히 정리하며 살 수 있겠다는 생각. 불가능하기에 꾹꾹 눌러만 놓았던 그 생각들이 울컥 쏟아지려 한다.

아이와 시간을 온전히 보내려는 것이 욕심일까. 지금도 내 피곤함에 아이와 밀도있는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는 죄책감이 한 구석에 있는데. 그것도 나의 조바심일까. 나와 너와 그와 우리의 밸런스를 위해서 나는 욕심을 버리고 좀 더 자유로워져야 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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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에는 10분에 한 번씩 지하철이 선다. 출근할 때나 퇴근할 때 모두 그렇다. 그저께 출근길에 막 문이 닫히려는 지하철을 잡으려 딸을 안고 뛰다가 열린 지하철 문 앞에서(착한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문을 잡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말았다. (그 착한 누군가가 딸을 안고있던 내 오른팔도 잡아줘서 다행히 딸은 다치거나 하지 않았다) 아마도 아침에 살짝 내렸던 비에 맹인 안내 보도블럭이 미끄러워졌기때문 인 듯 했다. 오랫만에 쪽팔렸고, 무릎이 너무 아팠다. 오랫만에 양쪽 무릎에 타박상과 멍을 얻었다.

그리고는 결심했다. 지근거리에 지하철이 오는게 보여도, 조금만 열심히 뛰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아도, 뛰지않고 8분을 기다려(마음먹고 천천히 걸어가면 뛰면 20초 걸릴 거리가 2분이 된다) 다음 걸 타겠다고. 그리고 오늘아침까지 이틀동안 두번 다 앞에 지하철이 오는걸 봤지만 뛰지 않았고, 8분을 기다렸고, 한 10분쯤 지각했다.

10분을 더 일하고 퇴근하는 길에는 우선 국철을 타고 두 정거장을 간 후 지하철로 갈아탄다. 국철을 타러 역 에스컬레이터를 열심히 걸어 내려가는데, 저어기 국철 꽁무니가 보인다. 열심히 뛸까 하다 아침 교훈을 기억하고 슬슬 뛰는듯 걷다가 이내 포기. 눈 앞에서 하나를 보냈다. 어차피 이럴거 그냥 세상 여유로운 척 느긋하게 걸을껄. 사실 나는 이 역에 들어오는거 아무거나 타면 된다. 아마도 노선이 한 6개 쯤 있을거고 얘네들은 모두 다 한 개의 승강장으로 들어온다. 물론 국철이라 지하철만큼 자주 오지는 않지만 다음걸 타기위해 10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될 만큼이다. 역시나 오늘도 2분이나 지났을까, 다음 국철이 들어온다.

나는 뛰지는 않을거지만 환승 거리를 최대한 단축하기위해, 맨 뒷 칸까지 최대한 걸어간다. 환승구간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는 올라가는 거니까 열심히는 걷지 않는다. 국철 역을 통과해 지하철 역으로 가는데, 이건 무슨 내게 주시는 신의 시험인가. 내가 타야하는 지하철이 1분 후에 들어온단다. 이런 경우는 이미 승강장에 도착해 있기 마련이고, 오늘도 그랬다.

나는 뛴다. ‘퇴근 후 10분’을 지하철역에 서서 핸드폰이나하며 보내지 않기 위해 뛴다. 내 결심은 정말 하찮다고 생각하며 동시에 열심히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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